도래(Arrival)

Written on February 16, 2018

영화 Arrival을 보았다. 한국어 제목이 컨택트여서 칼세이건의 소설을 재개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영어 제목부터 Arrival 이었고 한글로만 컨택트였다;;; 이 영화가 굳이 그렇게 옛날 영화의 명성에 기생할 필요가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쌍팔년도식 제목 수입이다.

배급사의 황포는 둘째로 하고, 영화 자체는 매우 재미있었다.

도래하는 것(Arrival)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외계인이고 이차적으로는 미래다. 그리고 영화에서 주목하는 미래는 무언가의 과정도 보여주지만 끝도 보여준다. 미래에서, 한나와의 삶은 즐겁고 빛난다. 하지만 결국 이안도 떠나고 한나도 죽는다. 루이스가 본 그 과정은 즐거웠을지라도 끝은 고통스럽다. 외계인도 마찬가지인 것이, 애담(외계인 중 하나.. 이름이 이게 맞나?)은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처”한다.

루이스는 외계인의 은총을 입어 많은 것을 알게되었지만, 미래를 볼 수 없는 평범한 우리와 이 영화는 무슨 관련이 있나?
언어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루이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놀랍게도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루이스가 아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정확한 미래의 삶은 잘 모르지만, 모든 것의 끝이 오리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안다. 누군가와 만나면 이별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며, 죽음이 우리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삶을 아무일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일상에선 그런 것들을 잊을지라도, 계속적으로 다가올 끝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끝을 각각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인간은 모두 루이스와 적어도 다가올 끝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이며, 예스이든 노이든 각자의 방법으로 피할 수 없는 그것의 도래를 알고있다. 지각하지 않고 있을 뿐.

여기에 영화는 제일 마지막에 이안의 입을 빌어서 끝을 알면서도 살아낼 용기가 있는지까지 묻는다. 이에 대한 루이스의 답은 예스이다. 루이스는 이안과의 끝을 알면서도 이안을 만나고, 한나가 병에 걸릴 것을 알면서도 한나를 낳음으로서 질문에 답하였다. 내 답은 무엇인가?

Cons
외계인의 형태가 전형적이다.
표의문자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 등 fancy orientalism의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