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Written on December 3, 2017

대학에서 이것저것 배워보고자 바쁘게도 다녔다.
아마존 인턴에 떨어지고 시무룩해서 생각해보니, 한다고 덤빈건 많은데 아는건 뭐 거의 없다.

컴퓨터는 전공은 채웠지만 심화 전공 정도는 해야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을거 같다.
종교는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다. 의문만 많아졌을 뿐.
철학도 잘 모른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만 했지
생물학은 듣긴 들었지만 재미를 못붙여서 그런지 잘 모르고
심리학은 겉만 살짝 햝아봤고
인류학도 구경만 멀리서 해본 느낌.
수학은 배우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서 안타깝고
한문은 껄덕거리긴 했는데 고전지식 부족을 절감한다.
이외에 정치, 외교, 사회, 물리, 화학 이런건 아예 배워보지도 못한 수준이고.

그렇다고 사회경험이 충분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고, 아직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른다.
글을 잘쓰는 것도 아니고 잘 읽는 것도 아니고 암기를 잘하지도 않고
수학적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진득하게 붙잡는건 잘하는가 싶었는데 또 꼭 그런것만은 아닌거 같고. 요즘 게으르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입실론 만 된 것도 아니다. 잃은 것들이 많다.
건강도 좀 나이에 따라 안좋아지고, 눈도 더 나빠지고, 성격도 좀 버렸다. 긍정마인드도 많이 줄었고
맘고생도하고 나쁜것도 많이 배웠다.

입학하고 군대빼고 5년인데, 결과가 무지에다 안좋아진것 무더기라니 참담한 심정이다.
난 내 청춘을 투자해서 뭘 배운걸까. 생각하는 법은 입학 대비 조금 는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반짝거리는 생각과 스스로를 돌아보는 생각은 줄어든거 같기도 하고.
자신감이 주니 학교에서 오는 특권에 안주하고자 하는 불성실한 마음도 불쑥 솟아오른다. 버려야 살 것인데.

김영민 선생님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뭔가 귀중한 것들을 과감하게 소비한 이에 대해서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실로 여러분들은 대학시절 동안 귀중한 것들을 가차없이 소비했습니다. 비싼 학자금이랄지, 젊음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시간이랄지.”
“어쨌거나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자원을 소비하는 일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의 시간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각자는 자기 식대로 고유하게 대학시절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평가는 여러분 개개인의 몫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대학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여러분들의 인생이 앞으로 별볼일 없으면, 여러분들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를 다닌 그 시절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과장하게 될 것입니다. 허울 좋은 대학 간판에 의지하거나, 이른 나이에 동창회에 나와 과거의 추억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2013년8월 졸업식 축사
졸업을 축하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뭔가 귀중한 것들을 과감하게 소비한 이에 대해서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실로 여러분들은 대학시절 동안 귀중한 것들을 가차없이 소비했습니다. 비싼 학자금이랄지, 젊음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시간이랄지. 그처럼 귀중한 것을 소비해서 뭔가 이루어나가는 것도 멋있어 보이고, 심지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 시간들을 낭비해버리는 경우에도, 부러웠습니다.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낭비해버리는 것은 그 나름 쾌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어쨌거나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자원을 소비하는 일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의 시간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각자는 자기 식대로 고유하게 대학시절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평가는 여러분 개개인의 몫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대학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대학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 political virtue를 습득했느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정치외교학부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온 대학생활에 대한 각자의 평가가 어떠한 것이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여러분들에게는 창창한 미래가 있고, 진정한 평가의 시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찾아옵니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때 평가 기준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일까요? 좋은 이야기의 조건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오늘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좋은 등장인물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부자가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으로만 점철된 이야기라고 꼭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패담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대한 망각도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요령 있게 망각하고 기억할 때 좋은 이야기가 남겠지요. 아무 일도 기억나지 않는 삶은 물론 지루한 이야기겠지요. 그래서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졸업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남아 있는 그 큰 도전의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이제 막 그 큰 이야기의 첫 챕터를 탈고한 여러분의 졸업을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 전공주임 김영민


2013년2월26일 졸업식 축사
졸업을 축하합니다. 대학시절이라는 골치 아프고 불안한 세월—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자기자신에 대해 불안한 세월–을 견디어낸 여러분들을 축하합니다. 그런 불안하고 골치 아픈 여러분들을 참고 견디어낸 부모님과 선생님들 또한 축하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졸업식을 마치고 떠나기 전에, 대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제 생각의 일단을 짧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여러분들이 사회에 나가면 중요하게 될 두 가지—예쁘게 화장하는 법과 멋있게 옷 입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주겠습니다. 기초화장을 잘 하고, 비비 크림을 바르고, 색조화장을 잘 하고, 명품 백을 든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핵심은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예쁘게 화장하는 법: 일 단계, 예뻐진다, 이 단계, 화장을 한다.
멋있게 옷 입는 법: 일 단계, 멋있어진다, 이 단계, 옷을 입는다.
요컨대 기본이 되어 있으면 거기에 무엇을 하든지 잘 됩니다. 대학이란 그런 기본을 연마하는 장소이고, 대학시절은 그러한 기본은 닦는 시간입니다. 기본이 잘 되어 있다면, 사회에 나가서 화장을 하든, 옷을 입든, 일을 하든, 술을 마시든, 실연을 하든, 다 잘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시절에 닦은 그 기본은 평생토록 여러분들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그 기본에 근거하여 앞으로 사회에서의 인생이 멋지게 펼쳐진다면 대학시절의 다른 부분들은 여러분들께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들의 인생이 앞으로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업이라는 껍데기는 여러분들의 생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이벤트로 남을 것입니다. 대학의 졸업장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앞으로 별볼일 없으면, 여러분들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를 다닌 그 시절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과장하게 될 것입니다. 허울 좋은 대학 간판에 의지하거나, 이른 나이에 동창회에 나와 과거의 추억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대학시절은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으로서 그 소임을 다할 뿐, 소위 명문대 졸업장이 주는 간판과 우등상이 주는 허울과 명문학과 졸업생이라는 허세는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앞으로의 여러분들 장래가 다채롭고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로 멋있는 인생을 살게 되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를 다녔다는 사실은 여러분 인생 전체로 보아 하나의 사소한 이벤트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멋있는 삶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서 연마한 기본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 전공 주임 김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