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Intellectual History Final Outline

Written on January 14, 2017

착안점:
논문에서 요시다 카네토모의 선지적 존재로 지헨이 언급.
지헨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읽었으며, 흥미를 느낌
왜 흥미를 느꼈나?

  1. 시대적으로 빠름에도 이후 신토에 수용되는 사상을 많이 포함함
    1) 반본지수적설: 신토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재해석
    2) 이세신토와 요시다신토의 가교
    3) 정치적인 특징
  2. 남북조시대에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두가지 의미가 있음
    1) 몽골의 침략이라는 대 사건 이후
    2) 조정이 둘로 갈라진 내전상태였음

여기서 나온 가설:

  1. 지헨 사상이 남조의 지적인 기반으로서 작용하였을 것이다.
  2. 그렇다면, 북조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다른 사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3. 그렇다면, 남조의 지적인 기반으로서의 지헨의 사상과, 북조의 사상이 대립 및 갈등관계였을 것이다.
    1) 각가의 사상에서 상대 사상에 대한 비판이 있었을 것이다.
    2) 각 정치세력은 각 사상의 후원자로서, 배타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자료조사를 통해 이 가설에 대한 검증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먼저 가설 1번에 대해 다루기전에, 당시 북조의 사상적 기반을 찾아보자.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Gozan Rinzai Zen Buddhism, 특히 Muso Soseki

  1. 가마쿠라부터 임제선종이 추구되어 왔었기 때문에, 이미 종파로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1) 가마쿠라 막부가 임제종을 도입한 이유
    2) 헤이안에서 임제종의 기반
    3) 오산 시스템의 시작
  2. 그 속성상 권력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명시)
    1) 재정적 종속
    2) 서비스의 제공
  3. 아시카가 가문 형제(특히 타다요시)의 임제종에 대한 선호
  4. Muso라는 인물의 특이성. 시대적으로 지헨과 동일하고, 그 역할도 충분함. 비중있는 인물이고 임제종에서 중요.

가설 3번에 따라, 이 상황에서, 지헨의 사상과 오산 사상 사이의 갈등이 보이는가? 안보이는 것 같다.

  1. 지헨은 분명 불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하지만 이는 불교 전반에 대한 비판이지, 오산을 라이벌로 생각하여 지목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반본지수적설을 볼 때, 타깃은 본지수적설을 적극 밀고있던 진언이나 천태이다. 지헨 본인도 천태에서 수행하기도 했고. 오산 시스템을 지헨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교 일반 비판에 그치고 있다는 점은 둘의 라이벌 관계가 성립하는지 의문을 줌.
  2. 배타적 후원이 보이는것 같지 않다. 배타적 후원 구도에 맞지않는 사실들이 많다.
    1) 남조가 오산을 지원하는 경우
    a. 고다이고가 헤이안의 오산을 시작하였음
    b. 황족들을 출가시켰음
    c. 무소와의 친밀한 관계
    2) 오산에서 남조를 보는 관점
    a. 무소가 지은 텐류지는 고다이고를 위한 것임
    3) 북조가 남조를 보는 관점
    a. 텐류지의 건립을 허가함
    b. 안국사/땡땡당의 건축은 겐코의 난 이후의 사망자를 위한 것

이에 대한 제기될 수 있는 재반박
1) 고다이고가 헤이안의 오산을 시작하였으나, 남조로 이전한 이후 그 통제력을 잃음
2) 고다이고는 권력을 위해서 어떤 사상이라도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임.
3) 무소와 친밀한 관계였으나, 고다이고가 요시노로 도망칠때 무소는 헤이안에 남음.
4) 텐류지를 고다이고를 위해 지었다고 주장한것은 당시 북조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한 방안이었을지도. 게다가 선후관계가 분명하진 않지만, 텐류지를 위해 원나라와 무역을 개시하고 이것을 승려들이 주도함. 경제력 확보를 위해 텐류지를 지었는지, 텐류지를 짓다보니 경제력이 필요했는지는 불분명.
5) 안국사 및 기타 건설은 겐코의 난 이후 사망자를 위한 것이라곤 한다. 그러나 정치적 행정적 목적이 다분하였음. 마찬가지로 정통성 확보 시도로도 해석 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산과 지헨이 대립하였다고 보는건 어려워 보인다.

  1. 서로 상대를 명확히 타깃으로 하는 반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무관심해 보임.
  2. 오산의 적은 신토가 아니라 기존 헤이안 불교였음.

마지막으로 가설 1의 검증
지헨의 사상이 남조의 지적 기반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1. 사상적 친연성이 존재하지만, 직접적으로 남조가 지헨에게 어떤 지원을 보낸 기록이 없음. 짝사랑 아닌가?
  2. 남조의 핵심 사상가 목록에 지헨이 없음. 키타바타케 치카후사 등의 인물에 밀림. 후의 삼방. 이들은 신토사상가로 분류하기는 어려움.
  3. 이세신토로의 지원이 있었는지는 추가조사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정리하기
위의 사실들은 지헨의 사상의 의미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나?
당시의 지배적 사상은 신토라기보다 불교.
가장 큰 사상적 갈등은 신토와 불교가 아니라, 불교 내의 기존 불교와 신불교 간 갈등이었음. 국책사업 등에서 드러남.
신토는 이세신토같이 독자적 신토로 존재하며 불교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으나, 우지가미등의 씨족 범위로 제한되어 국가적 이념으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임.
오히려 불교에 흡수되어 불교의 일부로 기능하였던 것이 일반적.
이 상황에서 지헨의 사상은 정치권의 반향을 크게 얻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헨의 인생을 건 회심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헨이 의미가 있다면
후대의 요시다신도에 영감을 준 것
신도의 정치이념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는 것
이런 점들에서 신도 사상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인물이었다고는 하겠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분할하는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못하였던 비운의 사상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게 아닐까.

이 보고서의 문제점
지헨의 경우 사상적 내용으로 파고들었으면서, 오산에 대해서는 사회적 맥락을 위주로 파고듬.
그러니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을 수도
하지만 그래도
오산이 신토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점(없는걸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지헨이 실제적으로 정치권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점(마찬가지로 없는것 증명하기지만)
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다른 접근법을 취할 수 밖에 없던 것이 당연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