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불각(不覺)의 원효의 해석에 대한 이해 (한국철학의 이해 1차 보고서)

Written on May 2, 2018

1. 불각 개념의 독특성

(…)故有生滅心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名為阿梨耶識 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云何為二一者覺義二者不覺1

대승기신론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뢰야식을 기능(義, function)으로 나눌 때, 깨달음(覺, 이하 각)과 동급으로 깨닫지 못함(不覺, 이하 불각)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불각이 설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일반 상식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세간에서 불교에 대해서는 윤회, 열반, 깨달음, 또는 불성 같은 개념들이 이야기 되고 소비된다. 즉 어떻게 하면 불교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가 불교에 대한 논의의 주제인 경우가 많다. 반면 그런 종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반대되는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의 부재라는 반(anti)-개념으로만 제시되곤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사상적으로도 반-개념의 지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이란 선의 부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선의 부재인 악은 그 자체로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없다. 선의 부재는 한시라도 빨리 종교적 선으로 채워저야 할 대상일 뿐이다. 혼란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신의 선한 뜻에 따라 바로잡아져야만 하는 것이다.2
그런데 대승기신론의 본론에서는 불각을 각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식이나 여타 종교와도 구분되는 독특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불각은 각과 단순히 동급일 뿐 아니라, 각과 함께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고 생성한다(攝一切法生一切法). 각만으로는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거나 생성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각은 단순한 각의 부재일 수 없으며, 능동성을 지닌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불각 개념의 전개와 원효의 해석을 통한 이해

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

불각에 대한 두번째 유의미한 언급은 시각(始覺, Actualized Enlightenment)을 설명하는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불각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은 사실 원문 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본각, 불각, 시각의 관계를 확정하기에는 원문의 단서가 부족하다. 따라서 원효의 해석을 통해 단서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이하 소)에서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시각(始覺)은 불각(不覺)을 기다리고, 불각은 본각(本覺)을 기다리며, 본각은 시각을 기다리는 것”3이다. 서로 기다린다(相待)는 원효의 해석은 세 개념이 각각 그 개념 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각이라는 개념은 불각에 의존해서만 성립될 수 있고, 불각은 본각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으며, 본각은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해석은, 비록 불각이 깨닫지 못하여 신체가 물들어(染) 잘못된 개념(妄念)을 가진 것이나, 각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개념임을 뒷받침한다.
대승기신론별기(이하 별기)는 서로 기다린다, 혹은 서로 의존한다는 조금은 추상적인 개념간의 상호 관계를 보다 구체화한다. 먼저 시각과 본각의 관계를 정리한다. 시각은 잘못된 개념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각에 의해 점차 각으로 변한다(熏習). 따라서 본각은 시각과 결과적으로 같아질 수 있다.
그리고 원효도 불각이라는 개념이 문제적이라는 것에 동의했던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불각을 설명한다. 먼저 원효는 불각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고, 다른 하나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은 아리야식 내의 근원적인 무지(無明, Ignorance)를 의미하고, 지말불각은 근원적인 무지에 의해 일어난 (잘못된 생각이) 물들어 버린 다르마이다. 따라서 근본불각은 현상의 원리에 가깝고, 지말불각은 현상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
원효가 불각, 즉 깨닫지 못함을 원리와 현상으로 분리하는 전략을 펼친 것은 불각과 시각, 본각과의 관계를 설득력있게 제안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별기에서 근본불각과 본각을 묶고, 지말불각과 시각을 묶어 세 개념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대승기신론 본문에서 아뢰야식을 기능을 나눌 때 (본)각과 불각으로 나뉜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불각은 각과 연결되는 근본불각인 것이다. 그리고 시각과 지말불각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뢰야식의 기능에 연결된다. 시각이 본각에 의해 점차 변하여 각으로 나아가기에, 지말불각은 시각으로 시작하여 본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자 생각이다. 본각과 근본불각이 현상을 낳는 원리적 지향점이라면, 시각과 지말불각은 현상적인 개념이 어떻게 본각으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해석 하에서 불각과 시각, 본각은 아뢰야식이라는 범주에 상호의존적으로 포섭된다는 것이 원효의 해석이다.
이러한 입장은 별기에 수록된 복잡한 문답의 말미에서 보다 명쾌한 형테로 제시된다. “본각(本覺)이 있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란 본래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시각(始覺)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각이 본래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본각이 없음’에 이른 까닭은 그 근원이 본각이 있기 때문이며, 본각이 있는 까닭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는 까닭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며, 불각이 있는 이유는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 의지한다. 그러니 여기서 모든 법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원효는 불각이 단순히 각으로 대체되어야 할 불안정한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진다. 불각은 근본과 지말로서 본각과 시각에 대응되고, 각 개념이 상호의존적으로 정의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본각과 불각이 상호 대비되는 개념이면서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어느것 하나 없이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어느것 하나가 있으면서 다른 것 하나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불각은 각과 마찬가지로, 아뢰야식 하에 존재한다고 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된다.

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 (…) 若離不覺之心則無真覺自相可說

대승기신론 본문에서 두 번째로 유의미할 정도로 불각을 언급한 부분은 앞에서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본문에 따르면,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즉, 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각이 없다면 불각 자체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개념은 각각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云何為三 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為業覺則不動動則有苦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以依動故能見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

불각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정교해진다. 대승기신론 본문은 불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상태(依不覺故生三種相)에 대한 복잡한 논의로 접어든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세 가지가 있다. 무지에 의해 카르마로서 움직이게 되는 상태(無明業相), 카르마로서 움직이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能見相), 그리고 카르마로서 움직이는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허위로 만드는 상태(境界相)이 그것이다. 움직이는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허위로 만드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움직이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면, 대상을 허위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또한 움직이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카르마로서 움직이게 되는 상태 자체가 존재해야하 한다. 결국 이 세 상태는 첫번째 상태가 두번째 상태의 전제가 되고, 두번째 상태가 세번째 상태의 전제가 되는 구조를 가진다.
원효는 이 부분을 지말불각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원효에 따르면 불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에 상태가 곧 지말불각이다. 이는 앞에서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을 구분할 때 사용해던 정의에 부합한다. 지말불각은 마음의 상태이자 현상으로서의 불각이며, 이러한 불각을 나누어 본다면 세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세 마음의 상태 중에서 가장 처음이 되는 첫번째 상태가 무지(無明)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무지와 같은 근본불각이 불각의 근원적 원리라는 것 또한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원효는 카르마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불각에 의한 것임을 보다 독자에게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곧 고통이라는 주장을 덧붙인다. “적정(寂靜)을 얻으면 이것이 곧 극락이기 때문에 여기서 움직임이 바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3. 불각에 대한 원효 해석의 타당성

원효의 불각에 대한 해석의 핵심적 전략은 불각을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본문의 해석을 돕는다. 첫 번째로는 본각, 시각, 불각의 모호한 관계를 깔끔하게 도식화 시켜준다. 근본불각을 본각과 짝짓고 지말불각을 시각과 짝지어 앞에서 소개한 것 처럼 해석한다면 명쾌해진다고 보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불각으로 인한 현상을 지말불각으로 정의하여 불각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에는 불각의 현상 또한 불각으로 불러야 합당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함이라고 말할때는, 실제로 특정 대상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일상적 용법에서의 불각은 현상에 보다 가깝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불각을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로 승격시켜 전개하기에 독자가 읽으며 혼란스럽기 쉬운 문제가 있다. 따라서 원효는 일반적으로 불각이라고 불리는 불각에 의한 현상 또한 불각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다고하여, 철학적 개념의 재정의가 가질 수 있는 혼란을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 것 같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뢰야식 하에서 본각, 시각, 그리고 불각의 관계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불각은 아뢰야식의 기능을 각과 함께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원효가 볼 때 각 자체가 어떤 현상이라기보다 깨달음을 얻는 원리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각 또한 그에 걸맞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불각은 단순히 각의 부재가 아니라, 각과 함께 현상을 낳는 원리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각의 원리적 해석에 의해, 각과 불각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성립될 수 있으며 다음의 본문이 해석 가능해진다. “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 (…) 若離不覺之心則無真覺自相可說”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각을 단순히 원리적 개념으로만 두게 되면 그 이후에 나오는 본문이 완전히 해석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원효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불각에 의해 발생하는 세가지 마음의 상태(依不覺故生三種相)를 원효는 지말불각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일상적 개념으로 보았을때 깨닫지 못함 그 자체이다. 움직이는 마음이 카르마로 인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마음이 있다고 잘못 인지해버려 깨달음에서 멀어지고, 인지된 마음에 의거해 인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오류를 범해 또다시 깨닫는 것이 요원해진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흔히 깨닫지 못함, 즉 불각으로 부르게 된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의 불각은 보다 상위의 원리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고자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지말불각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이런 친절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원효의 해석을 떼어놓고 본문만 보았을 때, 본문은 불각이라는 용어를 중복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보다 불각은 각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원리적인 의미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 불각으로 인한 세가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할 때, 본문은 분명히 그것들이 불각에 의존하고 불각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지, 불각 그 자체라고 말한 적이 없다(依不覺故生三種相). 만약 원효가 주장하는 것 처럼 세가지 마음의 상태가 (지말)불각이라면, 의존한다(依)와 생겨났다(生)는 동사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의존한다는 것, 생겨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구분된 존재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의존의 주체와 객체, 생겨나는 것의 주체와 객체는 보통은 다르며, 조금 양보해보아도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각, 시각, 본각의 관계를 지말불각의 도입이 보다 명확하게 도식화하는 것도 같지만, 굳이 지말불각 없이도 세 개념의 관계는 도식화될 수 있다. 불각과 본각이 서로 상호 대립적이지만 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단어의 의미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두 개념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할 때, 한 개념이 다른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아가 그러한 두 개념이 합쳐저 하나의 아뢰야식의 기능을 이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공간, 시간, 속성, 본질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시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시각이 두 개념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각은 시각을 통해 본각에 의존하며, 본각은 시각을 통해 불각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 자체가 불각과 본각을 연결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시각은 불각과 본각에 의존적이다. 이런 해석 하에서도 세 개념은 상호의존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개념의 구조적 설명력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시각과 지말불각을 도식적으로 짝지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원효가 지말불각과 근본불각을 구분한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지말불각이 굳이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되었다. 본문은 불각을 원리적인 의미로만 명확히 사용하며,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할때는 불각으로 인한 것이라는 표현을 분명히한다. 그리고 지말불각 없이도 본각, 시각, 불각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구조적으로 의존적일 수 있다. 따라서 원효의 개념적 구분이 오히려 대승기신론 본문의 불각의 개념을 보다 어렵게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1. 마명, 대승기신론. (수업자료). 이하 대승기신론 인용은 명백한 경우 생략한다. 

  2. John H. Hick, (1989), “Philosophy of Religion”, Pearson. 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3.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한글대장경. 이하 한글대장경 인용도 마찬기지로 명백한 경우 생략한다. https://abc.dongguk.edu/ebti/c2/sub2_pop.jsp?nbooknum=298&startpage=0&endpage=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