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정체성 (철학의 근본문제 기말보고서)

Written on January 26, 2014

Ⅰ. 서론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식적 관념은 너무도 확고하여, 이를 의심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황된 것으로 보이게 하고 만다. 우리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나가 자연스럽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상식적인 관점이 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틀렸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만 여기서 밝히고자하는 바는, 우리의 상식적 관념이 사실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확고한 자아관념과는 달리, 철학적 엄밀성의 잣대로 이를 살펴보면 정체성이라는 것이 모호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자기 정체성의 모호한 관념을 밝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구체화 한 후, 이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하여 정체성에 대한 의견을 설득력있게 표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 글의 목표이다.

Ⅱ. 본론

정체성의 재검토

누군가 정체성을 유지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이다’라는 관념을 유지한다고 할 때,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자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성 또는 동일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가령 ‘과거의 나’, ‘현재의 나’, 아마도 다가올 ‘미래의 나’가 어떠한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의 동일성이 상실되면, 특정 개인이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인식한다면, 그는 매 순간 다른 인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현재와 미래가 구분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과거의 자신이 한 행위를 저장매체를 통해서 보거나 기억을 더듬었을 때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괴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분명히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지속성에 대한 감각이 분절에 대한 감각보다 강하다. 설령 분절에 대한 감각이 강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감각을 우리는 ‘비현실적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감각을 넘어선 어떠함이 우리를 일관되게 묶어주고 있다는 것을 ‘현실적인’ 전제로 삼는다.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할 때 주로 논의되는 것은 시간성이지만, 공간성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의 신체는 과연 외부환경과 완전히 구분될 수 있을까? 뒤에서 추가적으로 논하겠지만, 정체성이 인간의 신체와 분리되어 의식에만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신체와 외부환경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신체와 외부환경이 연속적이라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신체와 도구의 애매성, 분자단위의 애매성, 외부의 영향에의 반응 – 결정론적 애매성)

정체성의 기제

시간성과 공간성의 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말하려면 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도록 하며, 공간적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독자성을 가지도록 해야만 한다.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영혼, 육체, 기억, 자의식, 공간과 시간의 점유, 타인의 관점에서의 동일성, 신적인 관점에서의 동일성 등이 대표적인 답일 것이다. 이러한 제안들을 무작위로 살피기보다, 기존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답한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 이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탈레스 등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 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등 자연철학자들은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질료에 있었다. 하지만 희랍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 영혼, 혹은 정신(nous)를 상정하였으며, 아마도 이것이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또는 재료인 질료를 추구하였기에, 인간의 자기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개 중 피타고라스는 특별히 비물질적 영혼을 상정하였기에,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과 유사한 관념을 가지고 정체성의 문제에 접근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한 것이 적어 이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플라톤(혹은 플라톤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것은 영혼이었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영원불멸한 것이고, 이는 메논과 파이돈에 걸쳐서 상기론, 대립자에 의한 논증, 친족성에 의한 논증을 통해 주장되었다. 따라서 정체성의 근간은 영혼일 수밖에 없으며, 신체는 영혼을 구속하고, 가시적이고, 필멸하는 것이기에 정체성과 연관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은 (1)영혼의 존재성과 불멸성에 대한 증명이 한계가 있다는 것과 (2)정체성의 문제에서 신체를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구체적 실체로서의 기체는 형상과 질료의 연합이다. 플라톤이 육체를 ‘정신의 감옥’ 등의 비유를 통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로서의 육체 또한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보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결정적 기제는 목적이었다. 돗단배의 비유에서 배의 재료가 결국 다 바뀌더라도, 그 방향성(목적)이 동일하다면 동일한 배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하였다. 그것이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이 동일하다면, 그것을 동일자로 본 것이다. 그런데 목적성은 그 목적이 다다르고자 하는 형상을 내포하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 중 보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된다. 이성의 발휘야말로 인간 고유의 기능이자 목적이기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형상으로서의 영혼이 동일성의 핵심일 것이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결정론을 지지한다. 이러한 물질적 결정론 하에서 인간 또한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외부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왜냐하면 외부세계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인과율, 혹은 원자의 운동에 의해 법칙에 따라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성의 의미는 존재적 차원에서 크게 희석되며, 인식적 차원에서의 감각은 허구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도 동일성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은데, 개인을 자유의지의 주체로, 사랑의 주체로 놓았으며, 구원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동일성을 기본적으로 전제하였다고 생각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 동일성을 유지 가능한 이유는 신이 자신의 아들인 인간을 그렇게 안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정체성의 측면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매우 유사하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보고, 육체적인 실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 이론과 흡사하다. 영혼은 인간에게 셩항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고, 동시에 이성을 통해 신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역할, 인간의 목적을 수행한다고 보아진다.

존재론적 자아 정체성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적 검토 및 수용

자아에 대해서 철학적인 논증을 펼치기에 앞서서, 우리는 현대 과학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분명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가 논하는 문제가 형이상학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적 차원 역시 현상적 차원과 괴리가 있어서는 그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상적 차원을 형이상학적 이론이 어떤 형태이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은 원리상 연구자와 사회의 주관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제도를 통해(예를 들어 반증가능성) 현상적 참으로 수렴해가는 매커니즘이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과학적 성취를 수용하고, 이 위에서 형이상학을 쌓아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어떤 특정한 생명을 어떤 질료가 모여 만들어진 ‘구성물’이라는 상식적 관점으로 보기보다, 그러한 질료의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로 본다. 쇤하이머의 실험에 따르면, ‘쥐를 구성하고 있던 몸의 단백질은 겨우 사흘 만에 식사를 통해 섭취한 아미노산의 약 50%에 의해 완전히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몸은 언제나 대체되고 있다. 신체의 구성성분은 항상 ‘동적인 상태’에 놓여있으며, 계속적으로 새로이 흡수되고 배출된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동적 평형(dynamical equilibrium)’ 상태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1
아리스토텔레스가 만약 이 실험을 보았다면, 자신의 목적적 자아 이론이 맞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질료가 다 대체되더라도 결국 목적이 동일하면 동일자이다. 쇤하이머 실험에서도 질료는 순식간에 대체되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질료는 동일성을 보장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목적이 정체성의 동일성을 보장하는지는 한 번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질료가 계속적으로 대체되더라도, 우리가 어제와 거의 동일한 기능을 오늘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질료가 과거의 질료의 기능과 역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기 때문이다. 어떤 자리에 있던 한 아미노산이 빠져나가면, 그 자리에 거의 동일한 아미노산이 들어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제 3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기능의 측면에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신체의 대체가 특정 법칙을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법칙은 DNA일 수도 있고, 촉매, 호르몬 등에 의한 특정한 규칙성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생명적 법칙성이야말로 동일성이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물질적 영혼(형상)이 목적을 담지하리라고 보았지만, 생물의 법칙은 물질적이다. 생물 법칙은 물질적 형상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적 차원의 동일성은 신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생명의 제 법칙으로 유지되고 있다. 신체를 구성하는 질료가 계속 바뀌더라도, 법칙이 동일하면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법칙도 신체 주변의 환경과 재귀적 상호 작용을 주고받아 변화할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인식론적 자아 정체성 : 의사소통을 통해 존재적 정체성으로 수렴하는 인식론적 정체성 ‘자의식’

존재적 차원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주체의 인식적 차원에서의 정체성 또한 중요하다. 인식적 차원의 정체성은 기억에 크게 의존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자아 정체성을 지속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다고 해서 자아정체성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억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타인의 행위처럼 느껴지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구분되고 만다. 역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해도, 기억이 없는 특정 과거의 순간을 누군가 영상을 찍은 후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혹은 그 사람이 당시에 특정 행동을 하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다면, 기억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임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식적 차원에서의 정체성의 핵심적 요소는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이다. 과거이든 현재이든, ‘이것이 나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면 자아 정체성은 인식적 차원에서 유지된다. 혹시 존재적 차원의 동일성과 배치되는 다른 것을 자기로 인식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관계로부터 대화를 통해 인식 수정을 지속적으로 요청받게 되므로 인식적 차원의 정체성 또한 존재적 차원의 정체성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런데 자아 정체성에 대해 인식을 가지면 인식적 차원에서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사실 동어반복이긴 하다. 하지만 인식적 차원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것이 기억 같은 추가적 요인이 아니라 인식 그 자체라는 것을 밝히는 것도 의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Ⅲ. 결론

여러 철학자들의 기존 논의를 기반으로 정체성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중세까지의 철학은 자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기에, 많은 부분 추론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존재론적 차원의 정체성에 대해 의견을 전개하는 부분에서는 현재의 과학적 성취를 적극 수용하여, 그것이 과거 철학자 중 어느 의견에 가장 부합하는지 살펴보았다. 물론 과학은 현상에 집중하고 철학은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지만, 이 두 개가 부합하는 것 또한 가능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이론과 어느 정도 접목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물질적 목적에 반해, 현대 과학은 물질적 법칙성이 형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식론적 차원의 정체성은 기억이라는 상식적 정체성의 기제를 비판하고, 동어반복적이지만 자의식만이 인식적 정체성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려 하였다. 인식적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인간의 사회성과 의사소통에 기반하여 존재적 정체성으로 수렴가능하다는 것 또한 보이고자 하였다.

참고 문헌

후쿠오카 신이치 (2007). 『생물과 무생물 사이』 p.133~146.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2008)

<철학의 근본문제> 수업 자료.

  1. 후쿠오카 신이치 (2007). 『생물과 무생물 사이』 p.133~146.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