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 (철학의 근본문제 중간보고서)

Written on January 15, 2014

Ⅰ. 서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엘렝코스라는 방법을 통해 앎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엘렝코스는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점은 우리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하였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사고하는 방식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우므로, 소크라테스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논의를 펼처나갈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직접 무엇이 옳은지 정확한 답을 물어볼 수 없으므로, 올바른 답은 정해져있지 않다. 따라서 본 보고서에서는 주어진 문제점에 대한 하나의 올바른 답을 구하기보다, 여러 가능한 답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Ⅱ. 본론

엘렝코스의 계기 및 그 기능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크라테스야 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델피의 신탁이 있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신탁을 검사해보고자 한다. ‘안다’고 말하는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앎을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만나 찬찬히 따져보니(엘렝코스를 시행해보니), 사실은 그들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 끝에,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 자체는 알기에, 그나마 신탁에 따르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시행한 엘렝코스는 여러 유익한 기능이 있다. 먼저 무언가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한다. 무지함에도 스스로를 아는 자, 현명한 자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두려운 일이기에, 이러한 상황을 엘렝코스를 통해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자기 자신에게 좋을뿐더러, 크게는 공공의 선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엘렝코스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 사람이 어떠한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기에 바람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라케스』에서 니키아스에 의해 말해진다.

엘렝코스의 시행 방법 및 평가

만일 p라고 주장하는 이를 만난다면, 이러한 p로부터 논리적으로 가능한 q, r, s를 뽑아낸다. 그리고 q, r, s에서 논리적 귀결로 ~p를 보이는 것이다. 즉 결국 p라는 명제는 부정되며, 실제로 맞는 것은 ~p가 된다. 결국 엘렝코스는 기본적으로 부정 명제를 산출한다. 이러한 엘렝코스는 크세노폰이나 플라톤의 여러 저서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반복적으로 시행된다. 『국가』, 『라케스』, 『파이돈』 등등의 저서에서 소크라테스는 계속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어떠한 명제 p의 부정과 이로부터 ~p의 산출은 우리를 일차적으로는 아포리아(무지의 상태)로 인도한다.
그런데 수많은 엘렝코스를 통한 무지의 모음이, 다시 말하면 아포리아에 도달한 상태가, 어떤 하나의 앎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엘렝코스의 결과 모종의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는 반면, 논쟁의 결과 부정되지 못한 명제가 무지의 모음의 여집합으로 추려진다 할지라도, 부정되지 못한 명제가 실제로 참이 아닌지를 담보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확실한 앎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부정적 해석도 가능하다. 어느 해석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는 힘들며, 이 또한 엘렝코스에서 한 번 생각해볼만한 쟁점이라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앎에 대한 정의와 무지의 앎에의 적용에서 나타나는 모순점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진정한 앎은 자신이 아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타인과 결부시키는 데까지 가능해야 한다. 타인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타인이 그 앎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결과 그 이전보다 더 좋아져야 하고, 이러한 가르침과 깨달음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진정한 앎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말한 대로 무지의 지를 정말로 안다면, 그는 자신만 모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모름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름의 가르침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하며, 상대는 무지를 자각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 사례에서 나타나는 엘렝코스의 상대자들이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였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논파당하더라도 그들은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기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화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거나, 비꼬거나 하는 식으로 나왔다. 『라케스』의 라케스, 『국가』의 트라시마코스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사실 무지의 앎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이러한 분명한 모순에 대한 여러 해결방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결방안1 - 사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사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가장 간단하게 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모순점을 찾는 데에까지 논리를 전개해 감에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다른 주장들이 합당하다고 전제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안다는 것이 틀렸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다른 명제들 또한 분명히 의심해봐야 한다. 그 의심의 과정에서 앞에서 드러난 모순점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들(‘앎이란 타인에게 결부시키는 것까지 효율적으로 하는 것’, ‘엘렝코스는 앎에 도달할 수 있는 방안’ 등)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처음부터 모순은 성립되지 않고 그 주장만이 그릇된 것이라고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해결방안2 – 엘렝코스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다

엘렝코스 자체가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주장도 검토해볼만 하다. 엘렝코스를 행하는 주체인 소크라테스는, 분명 무지한 자임이 틀림이 없다. 무지한 자는 아는 것이 없고, 엘렝코스를 행한다는 것은 분명 조금이라도 앎을 전제로 할 터이니, 무지한 자가 엘렝코스를 행한다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엘렝코스가 모종의 앎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히기만 한다면,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다. ‘엘렝코스를 통해 앎에 도달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무지에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에게는 전제로 깔려있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은 앎이 아닌 것일까? 이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앎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까지, 거꾸로말하면 무지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모르는 것이 무지하다는 것인지를 규정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무지란 무엇이라고 했는가? 말의 의미 그대로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무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해버릴 경우, 앞에서 말했듯이 ‘엘렝코스를 통해 진정한 앎 또는 무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앎의 범주로 포괄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되면 어떠한 앎도 가질 수 없는 무지한 자인 소크라테스가 엘렝코스를 행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엘렝코스가 제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기에 ‘무지의 앎의 모순’은 불가피할 것이다.
아니면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랑에 대해 한 말을 근거로 삼아, 그가 외연만 알고 내포를 모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맞다면, 엘렝코스를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연으로 보아야만 소크라테스가 ‘조금이나마’ 아는 것으로 처리하여 엘렝코스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엘렝코스에 대한 앎이 정말로 내포라기보다 외연인지는 단언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는 소크라테스는 사실 필요한 만큼 알고 있음에도, 단지 엘렝코스를 위해 모른다고 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편의적으로 논리 전개에서 필요한 부분은 앎으로 범주화시킬 수 있으며, 필요하지 않거나 무지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알지 못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분명히 앎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기에 타인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찾아가 망신을 주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어쩌면 사실은 이렇기에 엘렝코스를 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렝코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서는 엘렝코스의 전제인 ‘이성적 영혼’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엘렝코스는 이성적 판단의 끝에 올바른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이성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혼으로, 이러한 영혼은 감정·지각을 담당하는 신체와 달리 이성·합리 등을 담당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런데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영혼이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영혼이 정말로 이성만을 가지는지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영혼이 존재하고 이성적이라고 하더라도, 영혼은 전적으로 신체와 결부되어서 표현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성적이지 않은 신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표현(엘렝코스를 위한 발화 등)이 올바른 앎을 담보할 수 있는 지도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해결방안3 – ‘아는 자’에 대핸 소크라테스의 규정이 잘못되었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앎은 단순히 자신이 지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데에 끝나지 않난다. 주지주의적 지행합일을 추구한 소크라테스는, 앎과 행동이 사실상 하나라고 보았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주장이 그릇되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앎과 행동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설령 본질적으로 같다고 해도 현상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고 한다면 위의 모순은 어느정도 해결될 수 있다.

해결방안4 – 사실 엘렝코스를 당한 사람도 결국은 좋게 되었는데, 이야기에 나오지 않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방안은, 엘렝코스의 결과가 ‘실제로는’ 좋았음에도, 이야기의 구성상 이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를 보고 온 사람이, 그림자만 보고 있던 다른 사람을 데리고나가 이데아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태양빛의 눈부심에 당황하여 격하게 반응하리라는 내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엘렝코스를 당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이데아의 빛에 당황하여 그 순간에는 화를 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앎 또한 아는 자이므로, 그들은 그때가 지나면 결국은 좋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이데아’라는 개념이 나오기 이전의 사람이지만, 적어도 무지의 앎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그것의 ‘이데아’에 준하는 어떠한 앎(아마도 내포적 앎)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 또한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Ⅲ. 결론

제시된 모순점에 대해 여러 해결방안, 또는 변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기본적인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모순을 구성하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앎을 부정하는 방법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무지함에도 앎을 주장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였음에도 결국 실수하였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우리가 가진 자료의 한계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다 읽어내지 못하였을 수도 있으며, 당시의 실제적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함으로인해 오해하였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엘렝코스라는 방법은 그 잠재적인 논리적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이성적인, 올바른 앎에 도달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고전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의 여러 면면을 따져보고, 이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철학함’에 있어서 가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