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기준 (인문학 글쓰기 감상글)

Written on May 27, 2018

“기본이 되어 있으면 거기에 무엇을 하든지 잘 됩니다. (…) 대학시절은 그러한 기본을 닦는 시간입니다.”(‘2012년2월 졸업식 축사’)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학창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political virtue)을 습득했느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2월의 졸업생들에게’)

처음 위 구절을 읽고 고민에 빠졌던 때가 생각이 난다. 정치적 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것보다 정말로 대학 생활을 평가해야만 하는 것일까. 평가하지도 받지도 않고 졸업하면 안 되는 건가.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대학 생활에 대해 평가를 당하는 것은 나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다. 벌써 몇 년 간 매 학기 중간 점수로 기말 점수로 학점으로 수치화된 평가를 받아 왔다. 반복 되는 평가에 지쳐 학교를 떠나려 시도하면 더 가혹한 형태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학원 입학처나 회사 인사담당자에 의해 등급이 계산되고 매겨진다. 넌 120점, 넌 130점, 넌 1등 급, 넌 1++등급, 넌 2 등급 …. 소고기 품질 기준을 책정한 사람이 1 등급 위에 +, ++ 를 두어 서 소비자가 속기를 바랐듯이, 입사담당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메일을 만 명 단위로 뿌린다.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나 채용 규모가 적어 …’ 운운. 상황이 이런데도 또 평가가 필요 하다고?
그런데도, 정확히는 바로 상황이 그렇기에, 스스로 하는 평가는 필요하다. 대학 생활 동안 그리고 대학의 마지막 즈음에서 평가를 빙자한 여러 무례한 질문들에 노출되다 보면, 어느새 그 단편적인 평가들이 곧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 학점이 X라니… 내가 이 시험에 이번에도 떨어지다니… 나는 쓰레기야… 라고.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스스로에 대한 자기 평가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있다면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래도 조금 더 견딜만 한 것이 된다(누가 때리는데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수행해보고 마음 에 품고 살다 보면, 때때로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나 는 쓰레기이긴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래도 재활용은 가능한 정도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글썽이던 눈물을 닦은 후에 저녁을 먹으러 나갈 힘 정도는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설익은 폭력으로부터 내 마음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평가 기준을 세워야 한다. 김영민에 따르면 그 기준은 ‘정치적 덕성’이 되어야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는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성숙한 정치 주체’가 내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덕성이라고 한다.
덕성이라니 좋은 말씀이다. 좋은 말씀인데,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덕성을 쌓으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던데, 책 따위는 집어 던지고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가. 주위에 물어보면 누구는 동아리 활동을 해야한다고 하고, 창업을 해야 한다고 하고, 연애를 해야 한다고 하고, 또 공부하거나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제각각 말한다. 어떤 조언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다. 애석하게도 저자는 졸업식 축사에서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졸업식 축사라는 작은 지면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글들을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자 한 것인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정치적 덕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몇몇 에세이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특별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언급하는 부분은 없지만, 일반론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담은 문구는 있었다. ‘졸업의 몽타주’이라는 에세이에서, 정년을 맞이한 교수의 말을 빌려 김영민은 “주류에 서서 쉽게 인정받기보다는 (…) 비주류에 서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완강하게 걸어 나가”1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K교수의 국가론’이라는 글에서도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2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두 에세이를 통해 정리해볼 수 있는 정치적 덕성이란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정치적 덕성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타인과 사는 것을 겪어낼 수 있다. 저항정신을 가지고 때론 시대를 거스를 수 있다.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덕성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저자의 에세이들에 따르면 그러한 내면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으며, 그 결과로 정치적 덕성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에세이에 따르면 대학 생활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제대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반드시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를 찾아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수능 혹은 고시 같은 수단화된 공부만 하는 것은 불행하며,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 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3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 되 좋은 강의자를 알아보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강의자란, “기말 페이퍼 (…) 첨삭 지도를 손수 해주는 교수”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리고 너무 쉽게 대학에서의 공부가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런 허무감은 “대개 (…) 허약한 [공부] 체력에서 유래”4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좋아할 수 있는 공부를 찾아, 그것을 가르쳐주는 선생을 만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가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공부를 찾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나도 예외가 아니다. 설령 무언가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가 그것을 정말로 즐긴다고 확신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인지 운명적 끌림인지는 지금은 판별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과로 묶여있는 인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운명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 벌어지는 해석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설령 운명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연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대상이 나의 운명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몫이 아니다. 운명인지를 판단 하는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란 대개 지금의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도 미약하고 의미없는 개념이지만,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순간의 선택들은 비정하게도 아무런 용서 없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고 만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설령 운이 좋게 최후의 순간까지 운명의 상대로 생각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데에 성공하더라도, 또는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공부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기말 페이퍼를 꼼꼼히 첨삭해주는 교수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이 운명인지 아는 것도 불가능하고 귀인을 만나는 것도 어렵기에, 자축할만한 대학 생활의 상당 부분은 사실 운에 의존한다.
대학에서의 학업적인 운이 따라주지 않아 공부도 교수도 만나지 못했을 때, 혹은 만난 것 도 같지만 확신할 수 없을 때, 나는 졸업이라는 평가대 앞에서 불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일까. 앞으로의 긴 삶을 침범받는 내면을 가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타인, 국가, 사상 같은 외부의 어떠한 것의 폭력에 내면이 침습 당하는 것의 연속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저자는 다행히도 마지막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 (…) 그 [저항적] 언론인의 내면에 깃든 시란 설익은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5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바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읊조리듯이 ‘책이 좋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재미없는 말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를 하지 않는 대학생을 꾸짖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전자는 순환 논리의 죽은 말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의 자주성에 대한 월권이고 글쓴이도 하지 못하는 것을 강요하는 자기기만이다. 글을 읽는 것에 대해서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까닭은, 설익은 지적질로부터 무엇도 내 내면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나를 지키는 공부를 하고자 마음을 먹어도 그 길을 찾는 것은 온전히 운에 맡겨져 있다는 비관론을 만났을 때, 그나마 나를 절망에서 건지는 한 가닥 희망 비슷한 것을 살리기 위함이다. 때문에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은, 대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당위적 요구라기보다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실존적 몸부림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는 것인가일 것이다. 무엇을 읽어야 나의 내면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읽어야 쉽게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될까. 이 단서를 나는 ‘논어 에세이’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김영민은 논어를 읽으면 정치적 덕성을 갖게 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글에 적힌 것은 그보다는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이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6 저자에 따르면 삶과 세계가 텍스트이기에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읽는 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처해있던 세계를 이해하고, 그래서 이 글이 어떤 맥락 속에서 생명력을 얻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읽는 것이다. 글이란 그 글 자체의 주제를 떠나, 그러한 글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저자의 강력한 열망이 육화된 것이다. 그렇기에 글을 읽으며 우리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살아냈던 삶과 세계와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텍스트에 노출되게 된다. 글쓴이와 글이 위치한 세계의 맥락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나름의 해법의 주장으로서 글과 책은 읽어낼 의미가 있다. 그 중 고전은 여러 해답 중 어떤 이유로든 간에 오래 살아남은 것이므로, 한 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글들이다.
때문에 삶과 세계를 읽는 법을 배우면 내면을 지키는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평가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읽기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2012년 졸업식 축사
http://polisci.snu.ac.kr/bbs/view.php?id=kimym_etc&page=1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0

2월의 졸업생들에게
http://hankookilbo.com/v/b8a2966a544d4e11afef510d02491c24

졸업의 몽타주
http://hankookilbo.com/v/4a41a5c4a1904f5cb86118a9cff3acaa

K교수의 국가론
http://hankookilbo.com/v/7ea00a13f5164cec8c1d0438fd77e6d5

광장으로
http://hankookilbo.com/v/8aeb85196b3747bb991482e82f43566a

신입생을 위한 무협지
http://hankookilbo.com/v/1a61a6159bc74af3b91bcb51a823a6b0

수능 이후
http://hankookilbo.com/v/ec34ae354610417a8b477a21932cde43

생각은 죽는다. ‘논어’도 죽었을까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1267.html


수정사항

  1. 읽는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아 인용을 내주에서 각주로 수정하였습니다.
  2. 여러 곳에서 자잘한 문장의 흐름을 수정하였습니다.
  3. 운명적인 공부를 찾는 것에 대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원래 의도는 운명적인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선택할수 없고, 나아가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말이라는 것을 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후자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좀 더 강조했습니다. 원래부터 운명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다 보니, 그런 운명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무력하다는 것을 좀 극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과로 묶여있는 인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운명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 벌어지는 해석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설령 운명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연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대상이 나의 운명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몫이 아니다.”

  4.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자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바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읊조리듯이 ‘책이 좋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재미없는 말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를 하지 않는 대학생을 꾸짖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전자는 순환논리의 죽은 말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의 자주성에 대한 월권이고 글쓴이도 하지 못하는 것을 강요하는 자기기만이다. 그보다, 글을 읽는 것에 대해서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까닭은 설익은 지적질로부터 무엇도 내 내면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나를 지키는 공부를 하고자 마음을 먹어도 그 길을 찾는 것은 온전히 운에 맡겨져 있다는 비관론을 만났을 때, 그나마 나를 절망에서 건지는 한 가닥 희망 비슷한 것을 살리기 위함이다. 때문에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은 대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당위적 요구라기보다,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실존적 몸부림에 가깝다.“

  5.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삶과 세계가 텍스트이기에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읽는 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처해있던 세계를 이해하고, 그래서 이 글이 어떤 맥락 속에서 생명력을 얻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읽는 것이다. 글이란 그 글 자체의 주제를 떠나, 그러한 글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저자의 강력한 열망이 육화된 것이다. 그렇기에 글을 읽으며 우리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살아냈던 삶과 세계와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텍스트에 노출되게 된다. 글쓴이와 글이 위치한 세계의 맥락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나름의 해법의 주장으로서 글과 책은 읽어낼 의미가 있다. 그 중 고전은 여러 해답 중 어떤 이유로든 간에 오래 살아남은 것이므로, 한 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글들이다.”

수정글 댓글에 대한 답

ㅇㅇ씨의 댓글 반응을 읽고 생각해보니 이번 수정에 저의 약간은.. 삶에 대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입장이 더 많이 가미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 본문에서 독자를 수강생 분들로 상정하다보니 저 개인이라기보다 대학생에 대한 일반론을 담아내고 싶어서 그러한 것들을 많이 탈색시켰었거든요. 수정을 하면서 제가 아마도 갖고 있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면이 많이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학생 모두가 무언가 괴로움을 겪고 읽음으로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괴로움을 겪지 않는 것이 베스트이고, 실제로 겪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굳이 뭘 찾아서 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리고 설령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리고 하나의 방법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요. 친구도 만나고, 동아리도 하고, 시도 읽고, 소설도 읽고,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진료도 받고.. 각자 자신이 원하는 여러 방식을 사용해 대응하면 되는 것이죠. 댓글을 달아주신 ㅇㅇ씨든 인문학 글쓰기를 수강하는 분 누구든요.
제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대학에서의 생활은 대부분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만, 때로는 무언가로부터 내 마음이 위협당하는 것 같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버티고,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랬죠. 본문에는 넣지 않았지만, 그 때 시나 여행 에세이 같은 것을 읽으면서 위안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더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부에서 또는 읽는 것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가끔 힘들 때가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때에 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경험 공유차 글로 남긴 것이라 생각하고 이 글을 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1. 졸업의 몽타주 

  2. K교수의 국가론 

  3. 수능 이후 

  4. 신입생을 위한 무협지 

  5. K교수의 국가론 

  6. 생각은 죽는다, ‘논어’도 죽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