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있는가? - 베르그송의 "시론"을 중심으로 (서양현대철학 기말보고서)

Written on December 13, 2013

I. 서론

우리는 일상에서 자유에 대한 확고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감각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 그 어떤 무엇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단언하기는 힘들 것이다. 수많은 심리적 실험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맥락으로 선택을 요구하는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행동경제학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경제적 행동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물질적인, 아니면 신적인 제약 하에서 행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 같은 ‘행동의 제약’과 앞에서 언급한 ‘자유에 대한 감각’ 사이에는 긴장이 있게 된다. 자유를 감각하지만,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긴장은 자유에 대한 인식의 혼란을 야기한다.
인식의 혼란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개념에 대한 인식적 혼란은 이에 대한 애매하고 모호한 언어적 지칭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논의를 따라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제시된 기존의 여러 자유론에 대한 반박을 살펴보고, 베르그송 자유론의 특징과 한계를 밝힐 것이다. 이로부터 자유가 무엇인지를 새로이 규정하고, 이러한 자유가 가능한지, 즉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본 보고서의 최종 목표이다.

Ⅱ. 본론

1. 자유의 정의

자유는 일상, 정치, 사회, 심리, 생물 등 여러 차원에서 논의된다. 우리는 그 중 철학적 차원, 특히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자유에 대해 논할 것이다.1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자유 규정은 합의된 바가 없으므로, 자유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자유는 일상적으로는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2으로 생각된다. 이는 ‘무엇이(A) 무엇으로부터(B) 어떻게(C)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음’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자유 개념의 인식적 혼란은 자유의 주체(A), 자유의 대상(B), 자유의 방식(C)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기인한다. 따라서 각 요소에 대한 여러 이론들의 입장을 분석하고, 어느 주장이 가장 합당한 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2. 결정론 비판

(1) 자유의 주체(A)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행동은 제약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지금 당장 팔을 들어 올리고 싶다면,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하고서는 ‘자유롭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행동을 넘어 ‘내적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 경우에, 여러 주장은 자유의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동일하게 말하지 않는다. ‘연상주의적 결정론’3은 “자아를 심리적 상태들의 조합으로 표상하여,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과 함께 다른 것들을 이끌고 온[다고 생각한]다.”4 예를 들자면, ‘쾌락을 욕망하는 자아(식욕, 성욕 등)’와 ‘이성적 자아(선, 도덕, 실천 이성)’ 사이에 분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이성적 자아가 자유의 주체일 것이고, 욕망적 자아가 자아의 대상(B)일 것이다. 물론 꼭 이성과 욕망만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심리적 관념들의 대립쌍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연상주의적 결정론으로 대표되는 ‘자아 분란’에 기반한 분할된 관념으로서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철학에 있어서 자유는 지속으로부터 이차적으로 도출된 것이고5, 자유보다 본질적인 지속은 자아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속은 “물질과는 판이하게 구분되는 생명내지 의식의 존재론적 구조”6로, 모든 과거를 껴안고 보존해가며 지속적으로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지속은 상호침투성, 융합성, 상호용해성 등으로 표현되는 속성을 가지고있기에, 의식을 ‘욕망하는 자아’와 ‘이성적 자아’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상주의적 결정론은 의식을 분할된 관념으로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질적 요소를 제거한, 탈색된 관념화를 한, 공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자유론에서의 주체는 지속하는 一者로서의 생명 그 자체이다.

(2) 자유의 대상(B)

인간의 자유가 대상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대상화된 것으로부터 주체는 자유로운가? 『시론』에서의 기계론-역동론, 물리적 결정론, 심리적 결정론, 비결정론에 대한 베르그송의 반박을 통해 자유의 대상이 무엇인지 도출해 볼 수 있다.
『시론』에 따르면, 기계론과 역동론은 자유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기계론은 대체로 물질의 역학적·기계적 운동에 의해 자연 전체를 설명하려는 이론을 말한다.”7 기본요소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진 불변의 법칙을 세우고, 이러한 법칙의 지배에서 생명도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역동론은 물질의 타성적 운동이 아니라 정신이나 생명이 가진 활동력이 자연의 기본적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론 일반을 가리킨다.”8 따라서 법칙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실재이고, 법칙은 상징적 표현일 뿐이다.
기계론 하에서는 ‘법칙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하기 힘들다. 자유는 행위로 나타나는데, 법칙의 지배 하에서는 행위를 구성하는 운동과 변화가 항상 타성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론이 가장 단순한 것으로 보는 타성은 그 자체로서 정의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타성의 정의는 필연적으로 능동성(activite)의 개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9 따라서 이로부터 가능한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능동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쪽과, 능동성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다. 후자를 선택하게 되면, 결국 세계는 ‘이미 모두 주어진 것’이 되어 비시간성, 비공간성으로 빠지게 된다. 당연히 ‘법칙으로부터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법칙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하며, 세계는 고정된 채 그냥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전자를 선택하게 된다면 기계론적 의미의 ‘법칙’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물리적 결정론은 물질적 법칙을 자유의 대상(B)으로 본다. 따라서 능동성은 부정되며, 세계는 ‘이미 모두 주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수학자가 주어진 순간에서의 인간 유기체의 원자와 분자들의 위치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주의 모든 원자들의 위치와 운동을 안다면, …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행동을 계산해” 낼 것이다. 따라서 자유 규정의 대상(B)인 법칙 하에서 자유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베르그송은 물리적 결정론에 대해 세 가지 차원으로 비판을 전개한다. (1)먼저 물리적 사실에 대한 순수 원자론적 설명이 과학적으로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당대의 여러 실험을 언급하며10, 원자론이 다른 과학적 실험과 상충한다는 것을 밝혀 그 한계를 보인다. (2)그 다음으로, 부분적으로 물리와 심리의 대응성이 증명된 것은 맞으나 이를 전체의식으로 확장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주장한다. 물리와 심리의 대응성은 청각 같은 단순감각을 자극하는 물리적 현상이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야기하는 심리상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실험으로도 물리와 심리의 대응은 명백한 감각에서는 입증되었으나, 이것이 “심리적 사실이 분자운동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결코 증명하지 못할 것”11이라고 본다. 단순 물리적 감각에의 심리적 현상의 대응이 의식 전체의 물리적 결정론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근거 없이 이러한 과학적 발견을 전체의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전체의식과 물리의 대응이 입증 불가능함에도 물리적 필연성을 확신하는 것은, 결국 물리적 결정론이 심리적 결정론으로 환원됨을 의미한다. 결국 물리적 법칙이 의식에도 전적으로 적용되는가가 입증 불가능하므로, 앞서서 본 자유의 정의에 있어서 대상화(B)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3)마지막으로 만일 물리적 결정론을 대상화(B) 가능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지속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물리적 법칙은 완전한 비시간성이므로 지속과 모순되기에 물리적 결정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시 말해 물리적 법칙이 생명에도 전적으로 적용된다면 이 세계는 모두 ‘이미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이미 정해진 현상이 나타나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보기에 ‘즉자적인’(베르그송은 이 표현을 부정하겠지만) 지속과 상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리적 결정론의 주요 주장이 자유의 주체 논의에서 살펴보았던 연상주의적 결정론이다. 연상주의적 결정론은 의식을 부조리하게 나누어 분할된 심리적 관념을 자유의 주체(A)와 자유의 대상(B)으로 본다. 그 다음, 과거의 심리적 관념이 연합적으로 작용하여 필연적으로 현재의 심리적 관념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심리적 관념이 필연성을 가지고 현재 인간의 의식을 규율하므로, 능동성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입장에서는 지속하는 의식이라는 관점 하에서 대상(B)으로서의 분할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인과는 원인과 결과로 나뉘는 상호외재하는 요소들의 관계에 대해서 정의되는데, 자유의 주체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의식은 상호침투적인 一者이므로 심리적 결정론의 인과는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유 규정에 있어서 대상화(B)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의식을 관념단위로 분할한다 치더라도, 심리적 결정론은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동기나 숙고는 결단 후에 이루어”12지기 때문이다. 심리적 결정론이 전제하는 동기로서의 관념들은, 가상적이면서도 결정의 정당화를 위해 결정 후에 선택된 것이다. 동기에 대한 고려는 결정 후에만 이루어지며, 자기합리화의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기에 진정한 동기일 수 없다.
결국 베르그송의 결정론 비판은 궁극적으로는 생명체의 지속에 기반함을 알 수 있다. “행위가 예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시간은 공간인가 하는 질문에 귀속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즉 지속하는 것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반복하지 않으며 따라서 예견될 수 없다”13는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심리적 결정론의 관념들은 자유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유의 대상으로 보더라도 심리적 동기란 자기합리화의 산물일 뿐이기에 결정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물리적 결정론도 자유의 대상으로서의 법칙은 대상화하기에는 입증 불가능하고, 대상화 할 수 있더라도 지속에 의한 능동성을 생각할 수 있으므로 결정론은 성립될 수 없다.

3. 비결정론 비판

비결정론은 물리적, 심리적 인과를 자유 규정의 대상으로 놓았을 때, 생명의 능동성에 기반하여 자유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베르그송이 결정론에 반한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비결정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이 볼 때 “일단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14는 비결정론은 결정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점 O에서 점 X와 점 Y간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자유의 지지자들은 X와 Y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아’를 설정하고 설령 X를 택했더라도 Y가 가능했으니 자유라고 한다. 하지만 X를 택했다는 것은, 사실 진동하는 자아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X를 택할 활동성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도 가능했다’는 자유의지는 결정론과 동등해지고, 다만 차후에 이루어지는 인식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4. 베르그송 자유론의 특징

베르그송의 자유론의 핵심은 역시 지속인데, 지속에 의하면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가 ‘예측되거나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결정적이다. 그러나 과거의 지속으로 인한 인과를 인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필연적이지 않으나 지속에 의해 인과적인 ‘역동적 인과성’으로 베르그송의 자유론의 특징을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후기 저서에서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으로 확장, 정립된다.
비결정론과 결정론은 공히 ‘행위와 행위의 관계를 두고, 이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자유의 방식(C)에 기반한다. 즉 O라는 시점에 있어서 X와 Y라는 선택지가 있었고 결국 X를 선택했을 때, 결정론은 원래부터 X로 갈 것이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하며, 비결정론은 Y도 가능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두 입장 모두 X(행위)와 Y(행위) 중 어느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자유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선택을 하는 주체(자아, A)가 대상(B)으로부터 구속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를 분석하려는 관점에서의 시도인 것이다. 그런데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전제하는 ‘행위와 행위 사이의 선택’이라는 자유의 방식은 지속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여 생각함에 따른 오류로서, 지속은 흐르는 시간에서 의식과 동행하는 행위로만 있을 뿐 선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속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A로서만 존재한다. A만이 가능하고 ∼A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자유란 흘러가는 시간에서 자아의 행위 그 자체로서 정의된다. 이러한 행위의 구체성만이 실재일 뿐 이를 외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공간적이기에 불가능하기에, “베르그송은 따라서 자유에 관한 논의 자체를 파기시켜 버린다.”15

4. 베르그송의 한계

(1) 물리적 결정론 비판의 한계

베르그송의 물리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이 있으나 완전하지 않다. 생명과 이를 아우르는 세계의 복잡성은 현실적으로 모든 물질적 조건을 안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순감각을 넘어서는 의식과 분자운동의 대응은 실험으로 완전히 입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물리적 법칙의 입증불가능성은 자유를 不可知하게하는 것이지, 자유의 대상으로서의 지위 박탈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다. 입증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정말로 물리적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면 자유는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법칙을 자유의 대상으로 인정한다면, 지속은 능동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질적 결정론 위에서도 예측불가능성에 의해 ‘지속처럼 보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포착했다는 지속이 ‘지속처럼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속’인지는 불가지의 영역이기에, ‘지속’을 근거로 물리적 결정론을 반박하는 것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지속은 생명체와 물질의 이원론을 전제로 하는데, 현재 생명과 물질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2)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로의 자유 정의의 한계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로 자유를 정의16하는 방식 또한 분명히 한계를 가진다. 여기서 행위는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완전히 심리적인 경험 또한 포함할 것이다. 타인이 관찰할 수 있도록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심리적인, 관찰 불가능한 경험도 우리가 형이상학적 자유를 이야기할 때 포함되어야 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헌데 의식이라는 정신적 행위도 일종의 행위라면, 베르그송적 자유의 정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자유의 주체(행위자)를 지속이라는 속성을 가지는 의식으로 보았기에, ‘행위와 행위자 간의 관계’를 통한 자유정의는 ‘의식이라는 행위와 의식이라는 행위자 간의 관계’라는 무의미한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행위와 행위자 간의 관계’라는 자유 정의의 틀 자체가 가지는 속성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지속에 따라 의식의 창조적 진화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오로지 남는 것은 행위와 일체화된 의식인데, 이것에 자유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지속에 따르면 ‘자유는 존재한다’기 보다 ‘자유라고 부를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보다 엄밀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자유의 무의미성을 보이는 것이 베르그송의 의도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자유란 정의할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는 우리에게 어떤 추가적인 실재가 아니며, 지속만이 있을 뿐, 자유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단순히 베르그송의 주장을 수용하고 자유에 대한 정의 결론짓고 끝내기는 쉽지 않다. 먼저 서론에서도 언급한 ‘행동의 제약’과 ‘자유에 대한 감각’ 사이의 긴장에 의한 인식의 혼란을 베르그송적 자유론은 해결해주지 못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자유라 이름붙일 만한 것은 없는데, 우리는 분명히 ‘자유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정말로 단순한 정신적 착각일 뿐일까? 베르그송적 자유는 ‘행동의 제약’ 또한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분명히 외부로부터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제약받고 있다. 제약과 자율의 딜레마는 ‘자유는 무의미하고 행동만이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

5. 자유의 정의와 존재 가능성

행위와 행위자로서 자유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의식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의 정의를 다시 본래의 형태로 회귀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운가?
자유의 주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의식은 분명히 총체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며, 연상주의적 결정론의 관념 주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자유의 대상이 문제인데, 베르그송도 지속적으로 물리적 법칙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려 시도하였으나, 결국 한계가 있었다. 베르그송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물리적 법칙으로부터의 자유는 극복되었다기보다 불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데에 그쳤다. 『시론』에서 제시된 물리적 결정론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완전하지 못했다.
문제는 과학의 확장성이 불가지의 영역이었던 전체의식을 지속적으로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의 입장을 잠깐 빌려와 보자면, 과학적 사실의 객관성을 기반으로 다른 어떤 것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과학적 사실도 맥락 속에서 존재할 뿐 즉자적인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사실 상호주관성이지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이 맥락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과학의 본질이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실재를 찾기 위한 구조라는 것을 고려할 때, 과학은 맥락에서 탈맥락을 지향하는 체계, 혹은 도구임을 알 수 있다. ‘패러다임 변화’를 예로 들어 기존의 탈맥락화(과학적 사실)가 완전히 무효화될 수 있기에 객관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사실 완전히 무효화되었다기보다 정교화 되는 것에 가깝다. 고전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의 물리적 패러다임 변화는, 고전역학을 제한된 조건 하에서의 상대성이론으로 법칙화하여 수용하는 방식, 보다 정교화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과학은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로 수렴하고자 하는 성향을 부여받은 구조이므로 진리에 대해서 확장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의 확장으로 인해 생명과 물질의 이원론은 점차 힘을 잃고, 불가지의 영역은 점차 지식화되어 베르그송의 지속을 위협할 것이다.
자유는 점차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자신에게 완벽히 맞춰진 각본 하에서 연극하며 살아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적 법칙에 의해 쓰인 각본은 그 복잡성으로 인해 예측 불가능하나, 이미 모든 영상과 결말이 정해져 있다. 인간, 세계는 과학적 법칙으로 인해 조종되는 인형에 불과할 것이며, 그 실은 복합성이라는 베일에 완전히 가려져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성취에 의해서 복합성의 베일이 점점 벗겨짐에 따라, 우리가 인형에 불과할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어 졌다. 근래에 나타나는 놀라운 생명 과학적 성취들은 물질로서 정신을 분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적으로 암시하고 있다.[^17] 이전까지는 물질과 분명히 구분된다고 인식되던 정신이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확장성을 전제하면, 물질과 구분되는 생명과 자유는 ‘틈새의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론적으로, 형이상학적 자유 정의 하에서 인간의 자유는 불가지하나, 과학이 무지의 베일을 벗김에 따라 점차 자유롭다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Ⅲ. 결론

인간은 대체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는 자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유를 명확히 할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내용을 구성하였다. 여러 주장들을 검토한 결과, 아쉽게도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유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점차 그 실재 가능성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그송의 결정론 비판은 심리적 결정론에 대해서는 매우 타당하나, 물리적 결정론에 대해서는 한계를 보였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새로운 자유 정의는 동어반복적 무의미로 빠져 인간의 자유라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바라던 명제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1. 김태길 , 김준섭 , 박홍규. (1975). 근원적 자유의 이념에 관한 연구. 『철학연구』, 10(0), pp. 41-42. 

  2. 자유. (2013년 10월 31일). 위키백과, . 2013년 11월 30일, 13:27에 확인. http://ko.wikipedia.org/wiki/%EC%9E%90%EC%9C%A0 에서 찾아볼 수 있음. 

  3. 첫째, 동기에 의해 설명되고, 둘째, 자유의지를 믿어 필연성은 아니며, 셋째, 의식의 사실들은 모두 이유가 있고, 의식상태들의 상호결정에 의해 절대적으로 이루어지나 필연적이진 않음. Bergson, Henri. (2003).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서울: 아카넷. (원서출판 1924). p. 189. 

  4. 위의 책. p. 202. 

  5. 김진성. (1985). 『베르그송 硏究』. 서울 : 文學과知性社. p. 51. 

  6. 위의 책. p. 52. 

  7. Bergson, Henri. 앞의 책. p. 179. 

  8. 위의 책. 

  9. 위의 책. p. 181. 

  10. 위의 책. p. 185. 

  11. 위의 책. p. 189. 

  12. 김진성. 앞의 책. p. 55. 

  13. 九鬼周造. (1992). 『프랑스 철학 강의』. (이정우, 옮김). 서울 : 敎保文庫. (원서출판 1957). p. 303. 

  14. Bergson, Henri. 앞의 책. p. 271. 

  15. 김진성. 앞의 책. p. 59. 

  16. 김진성. 앞의 책. p. 60. / Bergson, Henri. 앞의 책. p.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