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서 비교분석 및 선호하는 복음서 선택 (기독교개론 단상페이퍼 01)

Written on September 23, 2013

Ⅰ. 서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신약전서로서,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상호 유사성이 높아 공관복음서라고도 불린다. 내용 및 구성상의 유사성에 의거, 세 복음서를 통합하여 통합복음서의 형태로 만들어 분석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한글 개역개정본을 기준으로 사건별로 재구성하였다. 역본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오역으로 인한 의미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나, 오역과 원본에서의 차이를 구분할 방법이 없으므로 오역이 없다는 가정 하에 분석하였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쓰여졌고 마태와 누가의 원본이 되었다고 추정되는 마가복음의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세 복음서를 Excel화 하여, 마가복음의 사건의 순서를 기준으로 동일한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사건을 배치하였다.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사건은 마태복음의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각 복음서의 고유사건은 각 복음서의 원 순서를 기본으로 하였다. 이렇게 만든 자료를 바탕으로 각 복음서를 비교해 보았다.

Ⅱ. 본론

마태/마가/누가복음의 특징을 비교해 볼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통된 기사를 놓고 각각 어떻게 표현했는지 비교해 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복음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고유사건을 개별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다.

1. 공통사건 분석

총 약 190개의 사건 중 100개 이상의 사건들이 적어도 두 권 이상의 복음서에서 중복된다. 하지만 내용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비교분석에 의의가 있다. 개중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 각 복음서에서 그리는 예수의 모습을 비교하기에 적합한 사건 위주로 선별하였다.

1) 예수의 계보(마1:1-1:17, 눅3:23-38)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계보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예수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예수로부터 거꾸로 올라가 아담을 거쳐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강조되는 마태복음은 예수의 민족적 성격을 강조하고, 누가복음은 아담을 거쳐 하나님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예수의 신성(神聖)에 보다 초점을 둔다.

2) 예수의 탄생(마2:1-12, 눅2:8-2:21)

마가복음은 예수의 계보와 마찬가지로 언급이 없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가 탄생할 때 찾아온 사람이 서로 다르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이 경배하였다고 하고,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찾아갔다고 기록한다. 동방박사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마2:2)이라고 부르나, 목자들은 천사들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구주”(눅2:11)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의 성격이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마태복음의 예수는 로마 치하에서 고통받는 유대민족의 구원자의 성격이 짙으나 누가복음의 예수는 유대민족으로 특정하기 보다는 목자 같은 사회의 약자계층을 위한 구원자의 모습을 보인다.

3) 복이 있는 자(마5:1-5:12, 눅6:20-6:26)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마5:3)으리라고 말했으나, 누가복음은 가난한자에게 복이있다(눅6:20)는 말과 더불어 부유한 자는 화가 있으리라는 말(눅6:24)을 더하여 사회적 약자계층을 대변하는 저항적 성격이 보다 두드러진다.

4) 예루살렘 입성(마 21:1-11, 막11:1-11, 눅19:28-40)

예루살렘 입성은 세 복음서의 차이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마가복음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11:9-10)라고 예수를 지칭한다. 마태복음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라고 하고, 누가복음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라고 한다. 마가와 마태 단어와 문장구조가 매우 유사하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이 보다 강조되어 있어 민족적 성격이 드러난다. 누가복음은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평화와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각시킨다.

5) 서기관과 바리새인 비판(막12:38-40, 마23:1-36, 눅20:45-47; 11:37-52)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간략히 지나가나 누가와 마태복음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의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23:33)라고 부르며 강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당시 유대민족의 지배계층이지만 로마에 굴종하여 같은 민족을 착취하던 이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6) 십자가에서 처형됨(마27:32-44, 막15:21-32, 눅23:26-4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마27:46)”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반면 누가복음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여 어찌보면 부활을 전제하지 않은 듯한 인간적인 좌절을 드러내나, 누가복음의 예수는 죽음을 초월한 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 고유사건 분석

각 복음서별 고유사건을 분석 해보면 복음서간 차이는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마가복음은 약 4개, 마태복음은 약 25개, 누가복음은 약 38개의 사건이 고유한 사건이다. 고유사건도 각 복음서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몇몇 사건으로 추려서 분석하였다.

1) 마태복음

아기예수가 헤롯으부터 에굽으로 피하는 사건(마2:13-23)은 예수를 왕으로 칭하는 것에 대한 헤롯의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예수가 진정한 왕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 에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유대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를 연상시킴으로서 예수의 민족적 정통성과 유대민족의 지도자의 속성을 강화한다.

가라지 비유(마13:36-43),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18:21-35),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마20:1-16)는 공히 주인에 대한 종의 복종, 즉 하나님에 대한 유대민족의 복종을 강조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오랜 로마의 지배로 인해 민족의 신인 야훼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던 것을 반영한다. 타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성의 상징인 민족의 신인 야훼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였기에, 마태복음은 신에 대한 복종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2) 누가복음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31)에서는 나사로와 부자를 대비시켜 사회적 약자인 빈곤층을 옹호한다. 공통사건에서 드러난 누가복음의 특징과 일치한다. 한 여자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눅7:36-7:50), 여자들이 예수의 활동을 도운 사건(눅8:1-눅8:3),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자를 고친 사건(눅13:10-13:17),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눅10:38-눅10:42)에서의 예수는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여성들을 위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사건(마27:32~44, 막15:21~32, 눅23:26~43)에서도 누가복음은 예수를 따르는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묘사하여 사회적 약자인 백성과 여자를 위한 예수를 그린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매우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마18:12-18:14)를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비유(눅15:1-32)로 확장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는 믿음이 부족한 자에 대해서도 주어지는 예수의 아가페적인 사랑(헤세드)을 보여준다. 삭개오의 이야기(눅17:18-19)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눅11:25-37)에서도 예수는 마태복음의 민족적 성격을 넘어 타 민족에까지 자비를 베품으로써, 헤세드적인 측면이 강화된다.

3) 마가복음

마가복음에 언급된 사건은 거의 대부분 마태와 누가에도 언급되어 있기에 고유사건이 부족하다. 개역개정 기준 다른 두 복음서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고유사건이 약 3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마태복음 약 33개, 누가복음 약 39개) 그나마 이 사건들도 예수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설교가 아니라 단순한 기적이다. 따라서 고유사건 분석을 통해서 마가복음의 예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고유특징으로 주목할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예수의 주술성을 볼 수 있다. 타 복음서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은 대체로 언어나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의 기사(막7:31-37)나 뱃새다에서 맹인을 고친 기사(막8:22-26)는 모두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거나’눈에 침을 뱉’는다는 주술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이런 전형적인 접촉성의 원리에 의거한 기조척인 감염주술 묘사에서, 예수의 주술사, 즉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유사건이 부족하기에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언급되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점을 가지고 마가복음의 특징을 말할 수도 있다. 마가복음에서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가운데에 간단한 설교를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예수의 행동에 따른 자연스런 대화로 설교가 짧게 나오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처럼 전적으로 설교만 이루어지는 부분은 찾기 힘들다. 설교가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기적의 묘사에 있어서는 마태나 누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이야기(막9:14-29, 마17:14-20, 눅9:37-43)를 들 수 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예수는 기적으로 경의를 일으켜 복종을 이끌어내는 엘리야, 요나, 미가 같은 구약의 선지자적인 성향을 가진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3. 복음서 별 예수 상 정리

마태복음의 예수는 반민족적 유대 지배계층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는 모습 등에서 고통받는 유대민족의 구원자이며 왕이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가 보이는 이념적 일관성이 드러나기보다는 단순히 병자를 치유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소박한 모습으로 그려짐과 동시에, 설교보다는 기적 위주의 구약적 선지자의 모습을 보인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민족적이기 보다는 사회적 약자계층을 위한 구원자이며, 타 민족이나 믿음이 없는 자까지 자비를 베푸는 신적인 헤세드의 화신이다.

4. 선호하는 예수 상 - 누가복음

이 중 어느 예수를 선택하느냐는 나에게 기독교가 어떤 의미이고,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는 꽤 전형적인 기독교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다가,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성경과 교리에 회의가 들어 무종교가 되었다. 대체로 모태신앙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은 기독교에 대한 애증 가지게 되는데, 나 또한 고등학교 때 까지는 기독교에 대해 공격적으로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을 어느정도 떨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무교이지만, 종교 자체의 영역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내 세계관은 크게 변화되었다. 우선 현재 사회에 지배적인 과학주의적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과학이 사실에 관한 것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가치를 생성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이 설령 세상의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밝힌다고 하더라도, 가치의 영역에서는 보조적인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문제점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가치의 영역을 인위적인 무질서상태로 방치함으로써 현실적인 가치교육의 필요를 무시한다. 그리고 성년과 미성년을 임의로 구분하여 성년에게 과다한 자유를 부여한 후 가치교육에서 배제시킨다. 가치를 자유주의적으로 경쟁시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이 여러 가치를 시행착오를 겪으며 선택해 나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게다가 인간의 성장을 인위적으로 이분하여 성년에게서 교육은 배제한 채 자유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올바른 가치를 함양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해결책으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바닥에서부터 가치를 분석하여 올바른 가치에 도달하는 방법이 있고, 위에서부터 올바른 가치를 곧바로 전달하여 학습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가 인문학적 사고라면 두 번째는 종교적 사고이다. 불행히도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인문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적인 자세만 견지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가치의 사각지대에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문학에 대한 실용적 대체물로 종교를 활용할 필요가 대두된다. 종교에 여러 기능이 있지만, 그 중 교육적 기능을 활용하여 성인에게도 가치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체적인 영성이나 믿음을 무시하고 과다하게 기능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지만, 종교를 기능론적으로 이용한다고 해서 영성과 믿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제공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공감(Compassion)이 가장 중요하다. 공감은 사람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차원에서 이데아적 가치가 된다. 대부분의 일상의 불행은 관계를 전제한다. 인간이 개선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관계에서 불행이 발생하는 이유는 첫 번째, 각 개체가 이기심을 내세우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비인간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심과 비인간화를 최소화하는 공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행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예수는 누가복음의 예수이다. 선지자 예수는 종교적 성인으로 남고, 왕인 예수는 민족의 수호자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예수는 약자들에게 공감하는 구원자로서, 헤세드의 화신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는 선지자도 왕도 아니고, 가치의 상실로 인한 관계의 고통에서 인간에게 공감이라는 길을 제시해줄 선구자이다. 따라서 종교는 공감의 가치를 중심으로 교리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고, 사회는 이러한 종교의 형성과 증진을 어느정도 보장할 필요가 있다.

Ⅲ. 결론

성경은 지금도 새롭게 재해석 되어야 하는 텍스트이다.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하였든 아니든, 야훼가 존재하든 아니든 텍스트로 기록된 예수의 삶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과학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치의 영역은 그 본질적 필요에도 불구하고 점점 소외되고 있다. 소외되고 있으면서도 소외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시된다. 과학은 사실의 언어이지만, 가치의 영역에서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자유주의도 인간을 지나치게 방치하여 몰가치한 상태로 유도하고 있다. 예수의 공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가치의 표본이 된다. 현실적으로 활용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관계의 문제는 공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궁극적인 의미에서 해결될 수 없다. 새롭게 해석된 성경과 예수는 공감을 사회에 전파하고 교육하는 중요한 기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Armstrong, Karen. (2010). 『신을 위한 변론』. (정준형, 옮김). 서울: 웅진씽크빅. (원서출판 2009).
개역개정NIV 한영해설성경 편찬위원회. (2010). 『한영해설성경』. 서울: 아가페출판사.

※ 리뷰에 따른 수정사항
지적사항1. 누가복음의 예수를 이민족까지 포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음.
→고유사건 분석시 삭개오와 사마리아인 비유를 추가하여 헤세드적인 측면 강조.
지적사항2. 마가복음의 주술성에서 타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졌고 원자료가 되었음을 밝혔는데, 이는 불필요한 부분.
→원자료의 근거가 된다는 부분을 삭제함.
지적사항3. 구약과의 유사성을 들어 마가복음이 구약과 신약의 중간적 형태임을 밝혔는데, 불필요한 부분임.
→해당부분 삭제.
지적사항4. 소제목을 두지 않음.
→소제목을 둠.
지적사항5. 마가복음에서의 예수를 무특징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음. 권위와 자비가 강조되지 않은 예수.
→고유사건 분석시 마태와 누가에는 언급되나 마가에는 언급되지 않은 사건을 통해 마가복음의 고유성 분석 추가.
지적사항6. 일반론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기보다 생활밀착적으로 접근. 철학적 용어를 풀어서 사용 필요.(ex)케노시스,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 등)
→카렌암스트롱의 자비와 연계햐여 논리를 전개한 부분 삭제.
지적사항7. 종교에 대해 기능론적 접근에 대한 논지 강화 필요.
→기능론 파트 논지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