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위기 (국제정치학 예습과제 10)

Written on October 22, 2013

Q. 1차 북핵위기와 협상과정을 추적하고, 북한, 미국, 한국의 외교적 대응을 평가하시오.


A. 1차 북핵위기의 직접적 발단으로 평가되는 NPT 탈퇴 이전에도, 북한은 그 목적은 차치하고서라도 지속적으로 핵기술개발을 추구했었다. 이에 국제사회는 다양한 각도로 북한을 제제하려 노력했다. 국제기구인 IAEA는 주무 국제기구로서 북한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유엔에 안보리제제를 요청하는 등 강경한 자세로 일관하여 북한과 갈등을 빚었다. 중국은 항상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왔으나, 핵문제에 대해서만은 UN결의안 의결시 기권표를 던지는 등 반대입장을 취하였다. 남한은 김영삼정부가 집권하여 대체로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였으나, 여론과 김영삼의 개인적 감정에 따라 정책기조가 흔들렸다. 미국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함과 동시에 북미 대화를 미끼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촉구하였다. 미국은 최초에는 북한의 핵개발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으나, 북한-한국, 북한-IAEA회담 및 핵시설 사찰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하지만 북한-한국관계가 사소한 실수와 김영삼 및 한국 보수층의 반대, 페트리어트 미사일의 한국배치로 인해 악화일로를 걷자 외교적 해결은 난망해진다. IAEA도 조금은 과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정부는 핵무기가 강력한 외교협상카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협상력을 최대한 높이는 전략을 사용한다. 북한은 사용 후 핵연료봉을 임의로 해체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조사를 회피하며, 실제 보유여부를 떠나 플루토늄 보유를 암시하여 협상카드로 사용했다. 이에 클린턴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을 시사하고, 전쟁여론이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터가 평양을 방북하여 조금은 재량권을 과다하게 사용하여 북한과의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1차 북한 핵 위기는 종결된다.

북한의 이와 같은 외교적 대응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까지 보여진다. 공산권 해체이후 고립된 북한은, 사용할만한 외교카드의 확보가 절실했는데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핵을 강력한, 그리고 유일한 외교카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특유의 종교적 권위주의는 근본적으로 개방정책에 매우 취약하기에, 그들은 국제고립 상태에서 개방은 회피하면서도 힘은 유지할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아쉬운 점이 많다. 물론 북한이야 체제유지가 근본 목적이니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국은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했다.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면 할수록, 북한은 자신이 가진 협상카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것이고 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북한과 미국은 서로 불신하고 있는데, 상대적 약소국인 북한이 불신을 풀기는 어렵기에 미국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제네바합의 이후에도 한반도는 평화를 찾지 못하였다.

한국은 일관성있게 발언하지 못하고 김영삼의 기분 및 여론에 따라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기에, 미국과 공조하여 북한과의 신뢰형성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방법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미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위기가 고조되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한국이다. 미국은 다만 타자일뿐이기에 전적으로 미국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 북한과의 협상에서 북미대화를 방관하기보다는, 북미한 삼자대화로 유도하거나 별도로 북한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경주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과도 서로 조율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료 정리

D. Oberdorfer, 두 개의 한국, pp.303-534.

  1.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 선회
    1) 변화의 근원
    2) 한-소 정상회담
    3) 셰바르드나제의 임무
    4) 붉은 기는 얼마나 더 나부낄 것인가?
    5) 한-소 경제협상

  2.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변화
    1) 필자의 북한 방문
    2) 중국의 노선 변경

  3. 핵개발 논쟁에 휘말린 북한
    북한 핵보유 – 남한, 일본 등 선진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경쟁 촉발, 북한의 핵수출로 인한 중동지역의 핵보유. 세계적인 핵확산 발생. 북한 정부 자체가 예측불가. 소련과 중국과의 동맹관계가 흔들리면서 유일한 외교카드가 됨. 애초부터 핵무기를 외교카드로 착안했다기 보다는 90년대 들어 핵무기 프로그램이 유용한 협상무기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
    핵개발 3대요소 – 원자로, 폭발실험, 재처리시설
    1) 북한 핵무기 개발의 기원
    70년대 후반 개발 시작. 85년 NPT가입 조건으로 소련의 경수로 4기를 받음. -> 국제사회의 개입 정당화
    2) 핵외교: 미국의 협상무기
    미국은 북한 핵문제 기피성향. 주변 강대국들에 핵문제 브리핑. 미국은 남한에 핵을 배치하여 공공연하게 북한을 협박해 왔었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한 배치 핵을 철수하려 했으나 어렵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급물살을 탐. 노태우때 모두 철수.
    3) 12월 남북기본합의서
    핵관련 논의 큰 전진. 하지만 협정은 맺었지만 남한의 의견이 대부분 수용됨. 북한의 이행 의도가 의심됨.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
    4) 뉴욕회담
    미국은 북한과 협상 시도. 중국과 소련의 대체. 켄터와 김용순. 남한은 추가적 대화가 없다는 선에서 허용. 회담은 개최하나 강경한 입장으로 나가는 것이 미국의 의도. IAEA 핵안전협정에 서명.
    5) 핵사찰단의 북한 방문
    미국은 IAEA관리들에 대한 교육으로 재처리시설 확인 시도. 사찰시 플루토늄 관련 북한의 거짓말 발견. 북한은 IAEA가 이정도까지 알아낼 줄 모름.
    6) 핵사찰 수용에서 위기로
    남한과 미국의 선거. 김영삼은 화해분위기가 김대중에게 유리하리라고 걱정함. 팀 스피리트 훈련 개최를 남한이 요구. 미국 국방장관이 워싱턴과 논의없이 발표함. 중대한 실수. 안기부의 간첩단사건 발표. IAEA의 사찰시도, 하지만 북한의 지속적인 발뺌. 안보리까지 동원하여 미국 위성사진을 활용 특별사찰 결정. 북한과 IAEA의 대립. 치킨게임. 북한의 체면문제. 남한과 미국의 정부교체. 하필 그떄 팀스피리트훈련 개최. 북한은 중대한 국익 조항을 들어 NPT탈퇴.

  4. 탈퇴와 협상
    한승주의 대응. 강온정책. 안보리 제제조치. 미국은 북한과의 단독회담으로 기움. 갈루치와 강석주의 만남. 커피숍회담. 공동성명 발표. 미국은 북한에 안보를 보장하고 공식대화를 지속하며, 북한은 NPT탈퇴를 유보. 위기감은 해소되었으나 핵사찰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함. 이에 남한 보수층은 남북관계를 제로섬으로 보기 때문에 분노함.
    1) 경수로 협상
    김영삼의 강력한 비판.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한다는 주장.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함. 클린턴 발언은 한국과 미국여론은 만족시켰으나 북한은 불만. 강석주는 국제사회가 경수로를 제공하여 에너지수요를 충족시키면 핵개발 계획을 수정하겠다고 말함. 경수로 제공은 까다로운 문제이나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고 핵사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미국이 인식. 북한도 핵문제로부터 빠저나오려 한다는 미국의 판단. 공식선언문을 채택했으나 사찰과 관련된 회담은 아직 미정. 북-한, 북-IAEA회담이 선결조건
    2) 제재에 나선 김영삼
    에스핀의 실언으로 잘못된 전쟁위기 여론형성. 이에 클린턴은 군사적 행동도 불사하리라는 의지 표명. 북항는 정기사찰, 남한과대화, 미국은 팀스피리트안하고, 3차북미협상 재개. 김영삼은 이에 분노. 남한 관리들과 논의된 사항이었음에도. 특사교환이 선결조건임을 주장. 미국은 이를 수용.
    3) 위기가 도래하다
    북한읙 경제계획 실패 시인. 미국의 페트리어트미사일 한국배치. 그럼에도 북한이 이를 수용하려할 무렵 남한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사찰을 받지 ㅇ낳으면 팀스피리트를 강행하리라고 주장. 미국정부의 여론에 휘둘린 미숙한 대응 때문에 북미관계 지속적으로 냉각. 송영대 대표의 불바다 발언.

  5. 핵무기를 둘러싼 막판 대결
    북한정부는 협상력을 높이는데에 치중. 벼랑끝 전술. 군사적 대치 강화. 8월의 총성과 비슷. 1차대전 발발상황과 유사. 미국은 실질적인 전쟁위험단계로 인식.
    1) ‘사용후 핵연료봉’ 위기
    미국의 첩보에 따르면 핵폭탄제조가능성. 하지만 추후 CIA도 자신의 의견 번복. 어찌보면 북한은 억울했던 셈. 하지만 북한은 오히려 핵무기 생산을 하지 않았으면 협상력이 감소하는 상황이기에 조사를 수용하지 않음. IAEA도 사용후 연료봉 제거작업 참관에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로 접근. 북한 자체적으로 제거. 북한은 플루토늄 보유량을 외부에서 알지 못한다는 포커카드를 쥐고 있음. 이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함. IAEA의 블릭스는 위상보호에만 관심이 있음. 북한은 이에 불만. 다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임. 전쟁발발 가능성 상승
    2) 군사적 행동
    작계5027이 공격전을 전제. 이 계획을 이병태 국방장관이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설명. 북한 억제책. 개전가능성 감지. 미국도 실전 수준으로 회의를 진행. 이 회의에서 심대한 타격이 예상되자, 미국은 외교적 해결로 방향 선회. 하지만 북한이 연료봉을 제거하자, 예방외교를 어쩔 수 없이 강경외교로 선회함.
    3) 깊어가는 갈등
    카터의 등장. 민간자격으로 평양방문시도. 이때 UN에서 강대국들(러, 일, 중)은 제제에 열의가 없음. 미국은 중국과 협력하여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도록 함. 미국내 전쟁분위기 고조. 강경책. 남한내 미국인 소개작전.
    4) 평양으로 간 카터
    전쟁을 막으려고 시도. 3차 북미회담 개시권한을 요청함. 김일성도 미국 지도층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원해왔음. 노력의 결실. 전환점. 반공식적인 성격. 카터는 3차 북미회담 이전까지 핵개발을 동결하고, IAEA사찰단원 추방을 하지 말라고 제안. 추방한다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라고 여겨질 것. 카터는 경수로 지원을 촉구하겠다고 말함. 유엔의 제제조치가 이루어지면 북한은 카터의 제안을 무시할 것이라고 말함. 카터는 CNN을 통해 협상을 발표. 미정부를 오히려 주변인으로 만들어버림. 미국은 요구조건을 수용할 시에만 용인하겠다고 발표. 재해석해 받아들이는 타협안 발표. 북한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 이에 힘입어 미군 유해 발굴 성립. 카터의 유엔 제제 관련 실언. 게다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양쪽 모두의 책임을 언급함. 정상회담 추진. 김영삼은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해서 냉담한 반응을 보임. 하지만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긍정적으로 생각.

  6. 김일성의 죽음, 그리고 합의
    1) 김정일의 권력승계
    2) 제네바 기본 합의
    3) 김정일 정권
    4) 원자로를 둘러싼 분쟁

J. Bajoria, “The 6 Party Talks on North Korea’ Nuclear Program,” March 2013

북핵 관련 주요합의문 및 주요연표(1990-2009). 장달중, 이정철, 임수호 저, 북미대립 (서울대 출판문화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