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한국전쟁 (국제정치학 예습과제 07)
Q. 냉전은 어떤 과정을 거쳐 끝났는가?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은?
A. 냉전의 종결은 공산권 내적, 외적 요인과 그 상호작용을 원인으로 하여 끝이 났다. 소련은 통제 경제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성장이 저하되었고, 70년대의 농업생산량 감소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신진세력을 대표하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여 글라스노트,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창하며 개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글라스노트로 인한 공산당에 대한 비판여론 및 비판세력 성장,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공산당의 독재 약화는 공산주의에 종언을 고하였고, 이는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공산주의의 실패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도 소련의 붕괴를 초래했는데, 분리주의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도 하나의 원인이다. 동구권에서는 소련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잔존했었고, 이로 인한 분리주의적 시위에 군사개입을 꺼림으로써 고르바초프는 진보, 보수 세력 모두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또한 경제 정책에서도 구 시스템을 해체했음에도 새로운 시스템 – 부분적 자유시장 도입 – 이 자리잡지 못하여 소련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미국과의 관계 또한 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기존의 자본주의-공산주의 대결구도를 버리고 양보를 통해 미국과 협력하려는 태도를 취하였으나, 레이건은 강경책을 취해 소련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국제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련이 고립되었고, 소련의 고립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내적으로 공산주의의 붕괴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우선적으로 김일성의 호전성과 중국-소련의 북한 남침의 허용에 있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끝나고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양 국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여 동맹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갈등관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하던 것을 멈추고 개입하지 않기로 한다.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여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는데, 이는 북한의 모험주의를 부추기고 말았다. 소련은 안정적 부동항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심에 북한의 침공을 허용하였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중국의 허가하에 북한이 침공하도록 한다. 미국은 막상 한국이 침공받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내적으로 개입을 지지받기 위해 이를 중국내전과 연계시켜 대만으로도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중국은 이를 미국의 아시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을 계획한다. 미국은 힘을 과시하여 중국이 국제질서로 통합되기를 의도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반대로 작용하고 만 것이다. 중국은 선제공격을 통해 미국에 장기적인 심리적 동등성 혹은 우위 상태를 얻어내려 하였다. 미국이 북한으로 역공격해 들어가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미국에 대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국이 힘을 집중시키기 힘들며 소련 때문에 핵무기 사용이 쉽지 않으리란 계산이었다. 별도로 소련은 지원을 빌미로 중국의 참전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추후 소련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기 위한 계획이었다. 결국 중국은 참전하였고, 중국군이 현대화됨과 동시에 소련의 의도대로 중미 대립구도가 완성되었다. 전쟁의 결과 미국은 한국을 지켜냈지만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강국으로 부상하게 허용했다. 이는 추후 베트남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중미 갈등이 중국의 소련 의존으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했으나, 중국이 자체적으로 성장하여 독자노선을 타게 됨으로써 결국 중소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만다.
자료 정리
Intro
냉전 이후 변화는 총 3가지
국제 시스템적으로 양극체제의 붕괴
국가적으로 국익을 재정의하거나 국가자체가 재정비됨.
국제기구적으로 역할이 변화함. 집단의사결정의 가능성이 생김.
냉전의 두가지 의미 – 미국, 소련의 갈등행위를 냉전으로 보는 측면과, 당시의 국제 구조 자체를 냉전으로 보는 측면. 전자에 의하면 탈냉전상황으로 판단되는 미-소 화해분위기마저 후자에 의하면 냉전상황의 한 단면에 불과.
공산주의의 실패가 냉전 종식의 원인은 맞지만, 모든 것은 아님. 복합적.
냉전의 구조적 요소 – 미 소간 정치 군사적 대립,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이념대결, 제3세계로의 슈퍼파워 갈등의 확장.
Ⅰ.내적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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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산주의 붕괴
1) 소련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 -> Alexis de Tocqueville : 혁명은 독재정부가 강할 때가 아니라 변혁을 시도할 때 일어남.
·1985.3월 고르바초프 등장. 비스탈린세대, 교육받은 전문가들의 신진세력 대표, 기존 원로들에 비판적, 변화의 상징.
·소련을 해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음. 비스탈린주의이나 반사회주의는 아님. 레닌주의.
·소련변화의 원인
장기적 – 경제문제. 중앙 통제 경제. 컴퓨터 혁명을 따라가지 못함. 농업의 약화. 유연성 없는 경제.
단기적 – 이전까지는 경제적으로는 중산업, 무기산업 위주로 경제가 돌아감. 석유도 보유.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의 유산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집단 희생이 가능했음. 본디 전시경제체제를 띠고 있었음. 그러나 서구에 맞춰 현대화하는데에 실패하고, 1970년대 농업생산량이 감소하고, 주요산업의 생산이 감소하고, 공중보건이 악화되면서 80년대에 문제가 두드러짐.
2) 고르바초프 개혁의 효과 : 글라스노트, 페레스트로이카
·위와 같은 구조적 문제가 고르바초프의 정책과 맞물려 위기가 됨.
·그 이전에도 고르바초프와 유사한 정책이 있었음. 다만 고르바초프는 강압이 아니라 동의하에 추진하고자 함.
·글라스노트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언론 통제를 약화시킴. 통제불능이 됨. 표현의 자유. 공산당의 지배적인 역할 원리를 약화시킴. 공산당과 관계없는 새로운 시민세력 등장.
·페레스트로이카 – 의회의 2/3을 대중투표로 넘김. 공산당과 관련없는 당선자 생김. 공산당의 터부에 대한 토론의 물살이 급격화. 고르바초프는 Executive presidency를 통해 톱다운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함. 하지만 정치기구의 역할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공산당의 독재가 약화되어 소련의 구조 자체를 위협.
3) 소련제국의 붕괴
·공산당의 약화. 억압되었던 자유에 대한 열망 분출
·분리주의 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탄압하지 않음. 그렇다고 분리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으므로 진보 보수 양쪽 진영에서 모두 불만을 가짐. 결국 소련이 해체됨.
4) 경제 재건시도
·공산주의 내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려 시도함. 사유농작, 산업협동의 합법화, 시장인정, 인센티브시장제도, 소련내 외국회사 도입, 개별회사의 외국 수출입가능.
·하지만 구 시스템을 해체했음에도 새로운 시스템이 확립되지 못함. 인플레, Shortage, 생산감소, 범죄율 증가, 사회불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결국 롤백함. -
동구권 공산주의의 붕괴
1) 저항세력의 잔존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계속 있어왔음
2) 1989의 봉기를 진압하지 않기로 함. -> Brezhnev의 Doctrine을 고르바초프가 버림.(주권제한 독트린이었음)
Ⅱ.외적요소 : 미국과의 관계
냉전을 끝낸 요소가 무엇인가
하나의 주장 : 레이건의 강경책이 좋았다
-두가지 반론
하나 - 소련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체한 것이다
둘 – 레이건의 정책은 오히려 냉전해체를 지연시킨 영향도 있다.
레이건의 정책에 대한 서로다른 평가. 부정적 입장은 소련자체의 내적 요소를 강조함.
소련의 양보 – 소련과 미국의 관계는 고르바초프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하룻밤만에 바뀌지는 않음. 미국은 조심스럽게 접근함. 소련은 기존의 자본주의-공산주의 대립구조를 버림.
소련에 의해 일방적이기 보다 미국도 정치적 시도를 했음. 레이건의 INF조약 등. 상호 교감이 있었음.
외적, 내적 요소의 상호작용
국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공산주의가 고립됨 -> 이에 대한 인식이 공산주의의 붕괴의 원인이 됨.
결론 – 결과와 함의
긍정입장
긴장의 완화와 핵전쟁의 위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임.
새로운 국제질서 – 미국중심
군축에 대한 자원투자 약화 – 경제발전을 도모
부정입장
냉전체제가 오히려 국제질서가 안정된 상태였음. 무질서가 될 것. 특히 소련이 해체되고 나온 국가들이나 동유럽 국가들.
미국의 헤게모니가 올 것 같지도 않고
UN이 막강해져서 국가가 해체될 것 같지도 않음
concert of powers. 하지만 예전처럼 강대국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은 민주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짐. 게다가 경제와 군사가 분리되어서 강대국을 정의하기도 어려워짐.
한국전쟁과 삼자외교
중국의 공산화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상호 비협조하여 미-소-중 삼자외교가 일어남.
소련은 중국을 불신. 티토와 같은 자생적 공산주의는 소련과 갈등할 가능성 높음. 중국으로부터 소련은 이익을 거두려 함.
스탈린은 중국을 경계함. 러시아의 영향을 가장 적게받는 공산국가.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
하지만 스탈린은 30년간의 통치와 세계대전이후 철저한 마키아벨리즘적 입장. 탈이념화됨.
스탈린은 오히려 국민당과 외교를 맺었었음. 그때 신장, 만주, 외몽골 획득.
얄타에서는 루쉰, 달리안 항구 획득. 대일전 참전대가.
중국공산당이 집권했지만 이권을 내놓을 생각 없음.
양국간 평화에는 관대함. 평화가 있어야 지원이나 동맹을 할 유인이 줄어듬.
미국, 영국의 반발을 고려해 중국과 동맹하기 힘들다고 말함.
중국과 소련간의 이익이 충돌할 수밖에 없음.
결국 중국의 의도대로 동맹 맺음. 상호원조. 중국에게 안전망 제공.
하지만 중국은 신장, 만주, 외몽골, 항구이용을 허용.
러시아는 중국과 러시아의 인구차이가 엄청나다는 것 또한 고민거리.
미국은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림에 따라 중국 내전에서 손을 땠다고 선언.
대만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지 않음. 오히려 러시아가 중국을 위협할 거라고 경고함. 국민당을 버리고 이익에 근거한 중미관계 추진. 이는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름.
미국의 에치슨선언을 비판하고 중국도 비판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지만, 두 국가 모두 에치슨 발언이 정확한 분석이라는 것을 앎. 중국은 러시아의 성명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직접발언을 피함. 중국은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
김일성과 전쟁의 발발
중러간 의심을 기반으로하여, 이를 부추겨서 미국과 전쟁을 결심하도록 함.
중국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적어도 타이완 점령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현재 미국이 국민당정부를 지원하지 않는 다는 생각을 바꾸기전에 어서 점령하고 싶어함.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보고 김일성의 침공 허용.
미국은 애치슨선언에서 한국이 방어선 밖이라는 것을 밝힘. 맥아더도 이미 그전에 그런 입장을 밝혔었음. 한국에서 미군 철수.
소련과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도 원인이 됨.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기위해 중국의 달리안 루쉰을 보유하였으나 언젠가 돌려줘야 함. 따라서 안정적 부동항인 한반도를 확보하고자 함.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의 허가를 받아 침공하도록 지시. 철저한 책임 회피자세. 중국에 책임 떠넘김.
미국은 막상 한국이 침략받자 개입하기로 결정. 이를 중국 내전과 연계하여 생각하여 국내의 지지를 얻고자 함. 그러자 중국은 이를 미국의 아시아 침략으로 규정. 미국은 어디까지 공격해 올라갈지에 대한 계획은 없었음. 추후 재통일 추진.
타이완에도 미 해군 배치. 미국과 중국은 상호 오해함. 미국은 힘을 과시하여 중국이 국제질서를 수용하도록 강제하려 함. 중국은 국제체제를 수용할 생각이 없음.
중국의 대응 : 다른 방식의 억제책
중국의 고유한 억제방침. 심리적 균형 – 심리적 우위에 서 동등하게 외교를 끌고가려는 목적. 상대의 위험계산을 변화시킴. 허접한 인민해방군이 핵무기를 가진 미군에 대항하리라고 생각 못함. 허를 찌름
중국에게는 이것이 방어적인 전략. 하지만 외부에는 공격으로 비침.
중국의 개입은 심리적 우위를 위함. 심리적 동등함 추구.
이미 미군이 방어전만을 부산에서 하고 있을 때부터 깜짝 공격 계획함. 장기적 관점에서 판단.
미국이 군사력을 집중시키기 힘들며, 소련을 고려하여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함.
철저한 계획하에 선제공격
미국은 중국이 개입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음. 이미 침략계획을 세워놓고 국제사회에 최후통첩을 이용한 통보.
러시아는 중국을 참전하도록 강요함. 참전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고 말함. 하지만 의도는 미국을 아시아에 남겨 중국을 견제하려 함. 중국의 소련 의존도를 높이고자.
중국은 북한정부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정부를 세우는 것을 매우 경계. 중국을 위협하는 미국과 만주의 권리를 노리는 러시아간 선택상황. 한국에 개입함으로써 러시아 선택. 스탈린은 간접적으로만 도울 뿐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려 하지 않음.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군이 현대화됨. 중미대립구도 완성
중미관계
중국의 외교적 발언들은 이미 개입을 정해놓은 상태에서의 혼란전술이었음.
전쟁의 결과 미국은 한국을 지켜냈지만 중국이 미국을 상대한다는 시선을 남김. 신뢰도 하락. 추후 베트남등에도 영향을 미침.
중국도 완전히 한국을 공산화하진 못함.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강국으로 부상. 군사신용도 상승.
러시아는 제일 손해를 봄. 김일성을 허가했으나 미국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함. 한반도 적화를 계획했었음. 중국을 지원하여 참전시켰으나, 이는 중국의 세력을 증가시킴. 중미갈등이 발생하긴 했으나, 이것이 중소연대로 이어지지 못함. 중국의 독자노선 추구를 막지 못함. 결국 전쟁 후 점차 중소관계 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