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 coldwar (국제정치학 예습과제 05)

Written on September 26, 2013

Q. 2차대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환상(illusion)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깨져나갔는가? 냉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A. 2차세계대전을 발생시킨 원인 중 하나는 국제관계에 대한 환상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이 히틀러의 영향력 아래 세력을 증강시킬 때, 서방 국가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현실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도덕적 국제관계의 환상에 빠지고 말았다.

대 독일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부상에 따른 여러 방안을 고안하였는데, 실제적으로는 별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적으로도 독일에 대한 수동적인 방어태세로 일관했는데, 독일이 라인란드를 점령할 당시 군사적인 측면에서 독일보다 월등했음에도 독일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과 마지노선을 벨기에 전선까지 확장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위해 영국과 동맹을 추구하였으나, 영국은 힘의 균형 정책을 무시한 채 오히려 프랑스를 경계하였다. 독일에게는 지속적인 무장해제를 종용하는 선에서 그쳤는데, 이는 독일의 도덕적 행위를 요청한 것으로 안일한 판단 하에서 한 행동이었다. 영국의 유화책은 독일과 해군협정을 맺은 점에서도 드러난다. 영국의 이러한 행동은 프랑스를 무기력한 자세로 몰아넣는데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국가들은 독일의 행위를 히틀러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 오류또한 범했다. 독일의 현실적인 군사력 성장 및 동부유럽으로의 팽창에 대해서 히틀러의 의도를 읽으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그의 야심을 키워주고 말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심리를 역이용하여 공격적으로 행동함과 동시에 평화적인 발언 및 조약을 발표하는 양면정책을 활용하였다. 결국 히틀러는 서방의 묵인하에 오스트리아, 체코까지 합병하는데에 성공한다.

2차대전의 승기가 연합군 쪽으로 기운 후, 각 국가는 전후보상을 놓고 대립하게 된다. 소련은 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동유럽의 영토를 받기를 원하였고, 영국은 그런 소련의 유럽진출을 막고자 하였으며, 미국은 동맹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집단안보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동유럽에 직접적으로 걸린 국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간섭하고자 하자, 소련은 미국의 도덕주의, 법치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뒤에 숨은 의도를 의심하였다. 미국의 협상가들은 정의와 선 같은 원칙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주장하면 결과가 나오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했고, 소련은 미국이 보다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를 바랐다.

소련은 공산주의에 근거한 판 슬라브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는데, 전쟁의 여파로 인한 피해가 커서 실제적인 세력은 약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위해 허장성세를 계속하였고, 이러한 자세로 인해 서방과의 협상이 의미있는 결과를 낳기 어렵게 되었다. 포츠담 회의와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보스포로스, 아프리카 식민지, 루르의 공동지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실질지배 요구가 전면적으로 거부됨으로써 두 세력은 합의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후 소련은 2차대전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찾음으로써 독일과 타 서방동맹국들을 동일시하여 공동행동을 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유럽이 양 세력의 영향력 하에 이분되자, 미국은 마샬플렌을 통해 냉전시대의 개막을 공식화하였다.


자료 정리

히틀러는 베르사유체제에 대한 민주국가들의 죄의식을 활용함.
베르사유 체제에 녹아들려 한 것으로 상당기간동안 평가됨
1차대전 독일 패배이 원인을 지도층이 끝까지 싸우지 않는 배신 때문이라고 생각
자기가 살아있을 때 모든 것을 성취하려 함. 건강상태에 근거하여 전쟁이 시작됨.
베르사유 체제는 독일의 동쪽으로의 점진적 확장 묵인 가만히 놔뒀어도 됐을 것을 전쟁을 하려함. 서두름
영국은 히틀러가 정부를 안정시켜 무장해제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 경계. 영국의 지원 보장 요청
동등하게 맞춰질까봐 오히려 독일은 비무장조약 탈퇴. 1933, 국제연맹도 탈퇴.
확실하지 않은 선택을 꺼려서 독일의 성장을 방치함.
주기적으로 평화를 위반하여 잠재적 희생자가 착각하도록 만듬.
한계에 다다를때마다 새로운 한계점을 만드는 듯 하면서 지속적으로 팽창.
프랑스가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질적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짐. 프랑스의 상대적 축소.
영국은 지속적인 무장해제 – 도덕적 요청 강조
영국 프랑스 모두 안일한자세를 취함. 영국은 스스로 군비 감축. 프랑스는 감축하진 않았으나 감축의 목소리가 나옴.
프랑스는 감히 혼자서 행동하지 못함.
행동해야 할 때는 모르고, 알 때는 이미 늦음.
일정한 군사력에 다다르면 히틀러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는 관계가 없음.
처칠의 경고 무시됨
프랑스는 동유럽과 일방적 방호조약에서 상호방호 조약으로 변경
하지만 동유럽은 독일을 막기에도 벅참. 프랑스 돕기 힘듬.
그중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을 맺어 독일과 프랑스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됨.
프랑스는 소련과의 협력을 추구하지 못했는데, 영국과 서운해질까봐, 동유럽국가들이 소련군대의 이동을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독일을 자극하여 전쟁으로 번질까봐임.
약한나라와의 공허한 군사동맹, 소련과의 군사동맹X, 영국의 소극적 태도
오히려 영국은 독일과 해군협정을 맺음. 회유시도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식민지화 시도는 국제연맹의 집단안보체제에 종언을 가함.
경제제제가 들어갔으나 석유마저도 제외. 사실상 허용. 집단안보의 이상이 독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너짐. 이탈리아의 점령 승인.
이탈리아와 연합하여 독일과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탈리아는 베르사유체제를 유지하다가는 독일의 타겟이 되겠다는 두려움에 친 독일로 선회.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역량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의 군사적 비행동을 합리화함.
독일의 라인란드 침공. 프랑스의 제어가 요구됨.
히틀러의 의도가 무엇인가하는 논쟁이 벌어짐. 히틀러의 양면정책. 고토를 되찾기만 하겠다고 선언.
영프는 베르사유체제라는 명백히 독일에게 불리한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전쟁을 한다는 사실을 꺼림. 결국 행동하지 못함. 히틀러의 의도에 집착.
사실상 독일은 당시 군사력이 약했음. 프랑스는 전략적 방어에 치중. 서구는 수동적 자세로 일관. 독일은 계속 알리바이를 만듬.
프랑스 전문가들은 안일한 예측으로 벨기에 전선 방치. 전문가가 정책에 종속됨.
라인란드사태시 영국은 이미 비참가의지를 밝힘. 베르사유, 로카르노에서 벗어나 히틀러와 협상 시도. 힘의균형정책 상실.
심지어 나찌를 반사회주의로 칭잔. 도덕적 후퇴.

승전이후
영국은 중앙유럽으로의 소련 진출 저지 목적
미국은 동맹체제 유지 시도
소련은 자신들의 희생을 영토로 보상받길 원함.
스탈린은 미국 지도자들의 외교에 있어서의 도덕주의, 법치주의를 이해하지 못함. 그래서 국익도 걸려있지않은 동유럽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의심.
포츠담회담은 성과를 낳지 못함. 귀머거리들의 대화
스탈린의 많은 제안들이 거부됨. 보스포로스,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 신탁통치, 루르의 4개국지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친소련 정부 설립을 서방이 인정
미국은 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의 자유선거 요구. 소련의 반대.
미국은 원자폭탄을 활용함으로서 입지를 넓히려 함. 소련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독일쪽에서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 배짱
유럽이 두 국가의 영향력 아래 양분됨.
미국은 정의와 선의 원칙에 기반하여, 악과 협상하기를 거부하며 외교함.
미국의 협상가들은 단순히 그들의 합법적 도덕적 정의만 반복해서 주장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
하지만 스탈린은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미국의 보다 설득력있는 이유를 필요로 함.
스탈린은 공산주의 이념에 근거한 판슬라브 연합 추구.
스탈린은 스스로 소련의 약함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함. 강한 척 행동. 허장성세.
2차대전이 자본주의의 결함에 의해 발생했다는 사고. 히틀러나 서구의 동맹국이나 결국 본질적으론 동일함.
소련은 군사적 지배에서 위성국가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
스탈린은 미국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 멀리 나감. 미국 불신.
유럽국가들도 자국의 공산주의세력을 의식하여 소련과 협상하는 것을 꺼림.
결국 마샬 플렌을 통해 냉전 공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