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철학적 이해 기말보고서

Written on January 28, 2014

(1) 인간 인식은 그 무엇이건 애당초 어떠한 객관성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반적 회의주의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들은 무엇인지 설명해보세요.(5점)

진리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으로 포착이 가능한가? 인식적으로 포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에 대한 답을 문제 (1)과 (2)에 거쳐 풀어낼 것이다. (1)에서는 진리의 인식가능성을, (2)에서는 인식된 진리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인식론적 상대주의(회의주의)의 주장은 몇 가지 대표적 근거를 가지고 논해지고 있다. (1) 진리를 주장하는 의견들 간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한 근거이다. 예를 들어 파르메니데스는 일자만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진리주장의 다양성이 절대적 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2) 검증되지 않는 진리는 없으며, 무한 소급은 결국 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 또한 근거로 제시된다. 모든 주장은 뒷받침하는 증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뒷받침 증거를 요구할 수 있으므로, 즉 무한 소급이 가능하므로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이러한 무한소급 논증은, 어떤 주장의 기저에는 결국 검증 불가능한 가정이 깔려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소급이 중지하게되고, 소급이 중지한다는 것은 그 지점의 명제가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순환논증만이 무한 소급이 가능한데, 순환논증은 사실 어떠한 진리성도 가질 수 없으므로 객관적 진리는 불가능하다. (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모든 인식은 관점적일 수밖에 없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각자의 관점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이러한 근거들은 논박 가능하다. 만일 인간의 인식이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을 주장한다면, 그 주장 자체는 자기반박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주장이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은 적어도 그 주장만큼은 객관적인 것으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대주의자가 위 주장조차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상대주의는 상대주의가 될 수 없으며, 만약 상대주의가 위 주장만은 객관적이라고 한다면, 위 주장은 참이 명제가 아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상대주의에 대한 반박이 가능하다. 상대주의는 인간 인식이 신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가지는 관점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각 개인의 관점이 각각의 맥락에 의해 규정되므로, 관점은 사람의 수 만큼 다양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의 다양성은 사실 상대성보다는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인간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탐구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탐구 공동체에서 인간은 각자의관점을 공유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언어라는 불완전한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어떠한 객관성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에, 탐구 공동체를 통해 도출해 낸 객관적 인식을 누적해 나갈 수 있다. 인식의 누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식적 차원에서의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객관에의 수렴이 가능함을 뜻한다. 결국 사회성과 역사성에 힘입어 인간의 인식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는 것 중 하나가 진리절대성의 논변이다. 탐구 공동체에 의해 사회적·역사적으로 도달된 객관성은 절대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탐구공동체에 의한 어떠한 명제는 객관이라기보다는 상호주관성이며, 객관에 수렴할 수 있을 뿐 진정한 객관, 즉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진리절대성의 논변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리 절대성의 논변은 기껏해야 논리적 참일 뿐이다. 뒤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진리의 규제적 이념성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절대적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객관적 인식에 수렴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구과정에 기여한다. 따라서 진리절대성의 논변은 참이지만,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또다른 반론으로 역사적 회의주의가 있다. 여태까지의 과학적 시도가 결국은 오류가 있었음이 후대에 밝혀졌으므로, 지금의 객관성에 대한 시도 역시 결국은 오류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분명한 귀납적 논증이기에 오류를 가진다. 과거의 사례로부터 일반적 규칙을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이 있을 것이기에, 객관적 참이 불가능하다는 주장 또한 제기된다. 하지만 이는 무지에의 호소 오류(참·거짓을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참·거짓을 추론하는 오류)이다. 즉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심지어 미지의 영역에 대한 입증 책임 역시 상대주의자에게 있으므로, 객관적인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올바른 비판일 수 없다. 미지의 영역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더라도, 가능성은 사실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으므로 상대주의의 근거로서 기능할 수 없다.
또 상대주의자는 진리라는 것이 현실적인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진리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유용성이지, 진리가 아니기에 이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정말로 객관주의를 배격하고 상대주의를 옹호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에 앞서서, 진리는 그 자체로 규제적 이념성을 가져 현실을 규율하기에 ‘실용주의적 진리’는 사실이 아니다.

(2) “진리(truth)는 규제적 이념성과 객관적 실재성을 동시에 가진다” 이 말의 의미를 플라톤이 제시한 ‘북극성’의 유비를 들면서 풀이해 보세요.(1.5점)

(1)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이번 문제에서는 인식된 진리가 가지는 의미를 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서, 진리는 규제적 이념성과 객관적 실재성을 동시에 가진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할 때에, 진리는 이상적인 목적의 역할을 함으로써 일종의 잣대로서 기능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플라톤의 ‘북극성’의 유비를 살펴볼 수 있다. 북극성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북쪽으로 향한다고 할 때, 북극성을 향하는 방향으로 키를 조종해야함은 분명하다. 우리가 북극성에 다다를 수 없고 기하적 의미의 완벽한 정북을 향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북극성은 배가 북쪽을 향하도록 한다.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진리에의 탐구가 진리를 향하도록 해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리와 마찬가지로 북극성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북극성이 이념적 규범으로서 기능함과 별개로 북극성 자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비록 그것을 인간이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진리 또한 경험적 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실재성을 가진다.

(3) 티코 브라헤가 지동설을 포기하고 천동설을 고수하게 된 논리적 사고과정을 설명하고, 여기에 어떠한 오류가 있었는지 설명해보세요.(자료와 강의의 범위 내에서)(1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체계는 미적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가졌다. 듀엥-콰인 이론에 따르면 실험관찰과 이론이 부합하지 않을 때, 테스트의 대상이 되는 핵심가설을 부정할 수도 있지만 보조가설들과 초기조건들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다. 갈릴레이는 핵심가설을 지키고 보조가설이나 초기조건을 부정하려했으나, 티코브라헤는 핵심가설을 부정하였다.
당시의 관측 자료들은 지동설과 천동설을 각각에 설명되는 부분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가졌으므로, 사실 티코 브라헤의 선택이 과학적 추론에 크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택의 동기에 있어서 갈릴레이는 르네상스적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티코브라헤는 기존의 기독교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성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시대적 한계를 고려할 때, 티코 브라헤가 완전히 그릇된 판단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후대에 보다 정밀한 관찰이 이루어지면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밝혀졌을 뿐이다.

(4) modern 이후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의 디지털화’에 있어, 케플러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항은 무엇인지 핵심적으로 설명해 보세요.(자료의 범위 내에서)(1점)

케플러는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다시 말하면 일종의 신비주의에 심취하였었다. 아직 how의 문제보다는 why의 문제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의 신비주의에의 심취는 오히려 modern science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현대과학의 특징인 모든 것의 디지털화는 신비나 주술을 기반으로 하는 목적론적, 유기체적 세계관이 기계론적, 인과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분석적·환원적 방법이 도입된다. 캐플러는 우주의 구조를 관찰함에 있어서 기하학적 조화와 단순성을 극도로 추구했다. 이러한 단순성에 대한 선호는 기존의 ‘원운동’, ‘우주의 중심은 지구’ 라는 상식적 관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조화의 원리에 대한 추구, 즉 과학적 미학의 패러다임은 현대과학의 분석적, 환원적 방법론이 자리잡을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우주와 지상에 서로 다른 법칙이 적용되었으나, 지동설 하에서 지구는 하나의 천체에 불과하기에 동일한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점 역시 환원적 방법을 가능하게 하여 현대과학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5)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성’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왜 까다로웠는지 설명해 보세요.(자료의 범위 내에서)(1.5점)

관성의 개념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상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관성운동은 사실 현상에서 관찰할 수 없는 이상화된 개념이기에, 감각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야만 이를 알 수 있었고, 이는 관성 개념의 수용을 더더욱 어렵게 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인(목적인, 작용인, 질료인, 형상인) 이론이 일반적 상식에 보다 부합한다.
일반적 상식을 넘어 관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문제를 던져야만 했다. 사람들은 무엇이 물체가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지를 문제삼았으나, 사실 올바른 문제는 무엇이 물체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인가였다. 후자의 질문은 기존의 사고, 통념으로부터 벗어난 창조적 사고를 필요로 했기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바로 도출하기 힘든 이상화된 개념인 관성의 개념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여러 잡음 속에서 순수한 자연의 신호를 읽어낼 수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경험적이고 상식적인 오답으로 귀결되고 만다. 따라서 관성의 개념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6)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갈릴레오의 ‘실수’(오류)는 무엇이었는지 설명해 보세요.(2가지. 자료에 있는 내용 안에서)(2점)

갈릴레오는 캐플러의 타원 체계를 승인하지 않고 원운동을 주장하였으며, 관성운동이 직선운동이 아니라 원의 선상을 도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류를 냈다. 두 오류 모두 원운동에 대한 모종의 집착으로 인하였음을 볼 수 있다. 캐플러의 타원체계를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갈릴레오가 플라톤주의적 신념에 의거하여 원운동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캐플러가 기존의 천동설 모형을 파기한 동기 역시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플라톤주의적 신념이었다는 점이다.
관성운동은 갈릴레오의 그 유명한 사고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경사면에 굴린 공이, 경사면을 평탄하게 만들 경우 계속적으로 굴러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다는 점에 착안하여, 관성운동이 원운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사실 그가 관성운동을 원운동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조금 부족하였다. 뉴턴 이전에도 물체가 땅에 떨어진다, 즉 중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갈릴레오는 이를 간과하고 관성운동을 원운동으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접하는 현상계는 거의 언제나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언제나 기본적으로 주어진 중력값을 없는 것으로 착각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관성이 원운동이라고 단정한 이면에는, 분명히 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완전한 도형인 원이 운동의 ‘형상idea’이리라는 그의 미적 선호가 깔려있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갈릴레오는 두 오류에서 공통적으로 플라톤주의적 원운동에 대한 선호로 인해 오류를 범하였다. 간결성을 추구하는 플라톤주의는 문제(5)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것의 디지털화라는 근대적 과학관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하였다는 것이 갈릴레오의 예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7) modern science의 출현 이래, modern science가 현대인의 생각에 영향(사상적 영향)을 준 주요한 사항들을 서로 연관시키면서 설명해보세요.(이전의 전통적 생각들과 대조하면서 사례를 들어 설명하세요. 단 수업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4.5점)

modern science(이하 현대과학)는 인간의 생각을 이전과는 크게 변화시켰다. 단순히 철학계에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현대인의 사유체계를 아예 이전과 구분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야기된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해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인간의 기본적 인식은 자기중심성, 사실과 가치의 혼동, 유기체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인간의 인식을 이로부터 변화시켜, 걀극 (1) 자기중심성에서의 탈피, (2)사실과 가치의 날카로운 분리, (3)모든 것의 디지털화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각각의 영향들은 독자적으로 현대인의 사상을 변화시켰을 뿐더러, 상호간에도 영향을 미쳐 변화를 가속되게 하였다.
자기중심성에서의 탈피는 사실과 가치 분리를 가속화하였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할 때, 인간 외부에 주어진 어떠한 사실적 현상은 가치로 전도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계에서 어떠한 특수성을 가진다는 사상은 대표적인 자기중심성의 반영인데, 이러한 사상에 기반하여 스토아 학파의 자연규칙에의 순응이라는 사유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후대에 자연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결국 인간 종에 대한 자기중심적 사고가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과학에 의해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함으로써,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것이 보다 용이하게 되었다.
자기중심성은 이전의 유기체적 사고관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인간의 종적인 자기중심성은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목적론적 체계를 가진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목적론적 체계가 인간을 목표로 하는 어떠한 유기체를 상정하는 이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는 것은 유기체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환원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록 하는 계기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사실과 가치의 분리가 자기중심성에서의 탈피로부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향을 준 측면도 분명히 있다. 뉴턴에 이르러 과학은 가치명제와 사실명제를 구분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로 귀결되었다. 이로서 인식적 차원의 종적인 자기중심성은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과 가치의 분리는 디지털화에도 영향을 분명히 주었다. 사실 유기체적 세계관은 가치와 사실의 결합을 통해 유지된다.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그 현상의 원인을 환원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어떠한 가치적 명제를 동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유기체적 세계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화 역시 사실과 가치의 분리로부터 힘입은 바 있다.
디지털화 또한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와 사실과 가치의 분리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화는 결국 기계론적, 인과론적 입장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인식적 자기중심성을 어렵게한다. 왜냐하면 인간 또한 기계적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이 어떠한 특수성을 가진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화의 환원적 방법론은 사실과 가치의 분리 또한 가능하게 하였다. 환원적 방법론은 모든 것에 대한 엄밀한 근거를 따지도록 하였다. 엄밀한 근거를 따질 때에, 가치적 근거는 사실적 근거에 비해 그 타당성에서 상대적으로 결함이 있다. 따라서 가치는 디지털화가 진행됨에 따라 설 자리를 잃어갔고, 사실은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에 힘입어 사실과 가치는 서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었던 것이다.

(8) 낭만주의가 출현하게 된, 과학 사상사적 이유는 무엇인지, 가장 결정적인 이유 한 가지를 제시해보세요.(1점)

낭만주의는 근대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일종의 안티테제이다. 근대 과학적 세계관은 모든 것의 디지털화라는 특징을 가졌는데, 디지털화는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이것의 논리적 귀결로, 인간에 대한 기계적 결정론이 등장하였음은 타당하다. 이러한 결정론 하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주장은 그 존립기반을 위협받았다. 많은 식자들은 근대 과학의 결정론이 기존의 도덕과 윤리, 더 나아가 감정, 창조성, 상상력을 말살시키리라고 우려하였으며, 이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에 힘입어 낭만주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필연적으로 낭만주의는 과학적 세계관이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이성과 반대하는 감정의 영역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을 추가하였다.

(9) ① 가설-연역적 방법이 본질적으로 귀납적인 까닭을 설명하고, ② 이것과 Popper의 가짜과학에 대한 비판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을 설명한 후, 이것으로부터 ③ Popper가 말하는 좋은 과학 이론의 특징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보세요.(4.5점)

① 가설 연역적 방법은 어떠한 과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단계에서 주로 사용된다고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귀납은 본질적으로 필연적 참에 도달하기 어려운 반면, 연역은 구조 상 필연적 참에 도달할 수 있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까지는 가설 연역적 방법이 연역의 일종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가설 연역적 방법은 명칭과 달리 본질적으로 귀납적이다. 가설 연역의 논리를 일반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A이면 B이다. 그런데 B임이 실험에서 관찰되었다. 따라서 A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전형적인 후건긍정의 오류이다. 따라서 B라는 실험 결과는 ‘A이면 B이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가설 연역적 방법이 연역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은 밝혀졌으며, 오히려 이것이 귀납이라는 것 또한 증명될 수 있다. 귀납은 ‘많은 수의 A가 다양한 조건의 변화 아래서 관찰되었고, 그리고 관찰된 모든 A가 예외없이 B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A는 B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관찰 자료를 얻을 때, 그것은 항상 모든 경우를 포괄하지 못한다. 관찰의 횟수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데, 유한한 관찰 값에 대응가능한 이론은 항상 무한하다. 즉 언제나 대안 가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찰 값이 ‘다양한 조건의 변화 아래서’ ‘예외없이 주어진 가설에 부합하게’ ‘수없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가설을 도출한다는 것은 반드시 귀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도달해야 할 결론 자체가 처음부터 통계적으로, 혹은 확률적으로 주어진 경우에도, 관찰 값이 아무리 다양한 조건에서 많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필연적 참에는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관찰 값에서 확률 명제를 뽑아낸다는 것은 반드시 귀납일 뿐이다.
따라서 가설 연역적 방법은 논리적으로 연역일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반드시 귀납적이다.
② 가설 연역적 방법의 본질적 귀납성은 소위 ‘가짜과학’이 필연적 참일 수 없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포퍼의 가짜과학 비판과 논리적으로 연관된다. 포퍼에 따르면 그 당시 학문에는 가설 연역적 방법에 의존하여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들(맑스의 이론, 프로이트의 이론)과 연역적 방법(반증의 논리)에 의존하여 과학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포퍼는 귀납적 방법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 두 학문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과학’이라는 용어가 필연성을 전제해야한다는 생각 하에, 포퍼는 전자를 가짜과학이라고 칭하였고 후자만을 진정한 과학으로 인정하였다.
가짜과학은 반증을 활용한 연역적 방법을 취하기보다, 가설 연역적이라는 본질적으로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였다. 그러면서 반증가능성을 내포하는 과학과 동일하게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타당성에 일종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포퍼는 가짜과학의 주장은 가설 연역적 방법의 본질적 귀납성을 고려하였을 때, 그리고 귀납적 방법이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③ 결국 포퍼가 말하는 좋은 과학, 참된 과학은 가설 연역적 방법으로 얻어진 증거들로는 도달할 수 없다. 진정한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반드시 가져야한다.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주어졌을 때, ‘B가 아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 밝혀진다면, 대우명제에 의해 A가 아니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반드시 참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적 일반화는 관찰 값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지만 반증될 수는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반증가능성이야 말로 진정한 과학,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특징이 된다.
따라서 진정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공하는 ‘위험성 있는 예측’(반증 가능한 예측)이 많아야 한다. 더 많은 실험에서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더 좋은 이론이다. 위험성 있는 예측의 대표적인 예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에딩턴의 실험이다. 위험성 있는 예측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실험이 전제된 가정에 부합한다면, 이것은 ‘강화하는 증거’로서 기능한다. 물론 강화하는 증거가 그 가설이 반드시 옳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설을 ‘강화’하는 역할 정도는 수행한다.
결론적으로 포퍼에 따르면 진정한 과학은 이전까지의 통념과는 달리 귀납적 방법보다는 전적으로 연역적 방법(반증가능성)에 의존하며, 연역적 방법만이 진정한 과학을 보장한다.

(10) 토마스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 활동 및 과학혁명의 과정이, 과학에 대한 일반적 생각(대중적 통념, 일상적 이미지)과 대비·대조되는 점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그리고 서로 연관되는 방식으로 설명해보세요.(강의를 통해 논의된 사항들을 모두 포함합니다.)(4.5점)

과학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철학적으로 정제한 주장이 논리실증주의이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과학은 크게 (1) 경험적 확실성, (2) 논리적 체계성, (3) 누적적 발전을 특징으로 한다. 경험적 확실성이란 과학 지식이 명백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 체계성은 과학이 논리적인 규칙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적적 발전은 경험적 확장과 논리적 확장에 의해 진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특징은 과학이 다른 지식에 비해 특별한 지위를 가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통념과는 달리, 토마스 쿤에 따르면 과학은 이러한 특징을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물론 과학에 대한 통념적 특징들을 토마스 쿤이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특징들이 상당히 이상적인 반면, 현실에서의 과학은 이상적인 형태로 흘러기자만은 않는 다는 것이다.
(1) 과학은 정말로 명확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는가? 우리가 만일 어떠한 과학 실험을 수행하였다고 하자. 이 때 실험의 결과는 항상 우리가 예상을 의존하는 이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며, 사실 ‘어느 정도’의 오차조차 아닌 범위의 데이터가 나오기도 한다. 즉, 관찰결과가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통념에 따르면 이 때는 기존 이론이 수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과학자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먼저 제기된다. 경험적 사실보다 이론이 우선성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차가 일관적으로 여러 실험을 통해 제기된다면, 과학 혁명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실험결과와 이론의 불일치는 이론의 승리로 끝이 난다.
(2)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이러한 상황은 과학이 논리적 체계성을 가지는 추상적 규칙에 의해 지배받기 보다는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에 발생한다. 통념과달리 네트워크로서의 패러다임은 추상적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고, 추상적 규칙 역시 네트워크를 하나의 얼개로 묶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현실적으로 과학적 작업은 추상적 규칙보다는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받으므로(문제 12번 참고), 일관된 논리적 체계성을 가진다고만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실험결과와 어떤 이론이 배치되더라도, 패러다임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과학 연구는 통일된 규칙 없이 네트워크적 패러다임 위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3) 이러한 네트워크적 패러다임 단위의 과학 탐구는 과학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 혁명은 말 그대로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급진적 전환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은 통일된 규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므로, 오류가 발생할 때마다 수정되기 보다는 인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패러다임이 지탱할 수 있는 오류의 한도를 벗어나, 오류가 일관성을 가지고 관찰되며, 패러다임을 지탱하고자 하는 시도가 역설적으로 패러다임을 붕괴시킬 때(문제 14 참조)에 ‘혁명’이 가능하다. 만일 과학이 논리적 체계성을 가진다면,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보다는 점진적인 누적적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혁명적 변화 또한 인식론적 차원에서 비가역적이기에 분명히 진보이고 누적임은 분명하지만, 점진적이지는 않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과학혁명이 일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므로 점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통념적 점진성과는 거리가 멀다.

(11) Kuhn이 말하는 정상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뢴트겐의 X선의 발견이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충격(나아가 속임수)”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보세요.(2점)

토마스 쿤의 주장에 따르면 정상과학 시기의 실험은 기본적으로 퍼즐풀이이다. 퍼즐풀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되는 답이 존재하고, 실험자는 예상되는 답을 도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상과학 하에서의 실험은 큼지막하게 새로운 것(major novelties)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험의 결과에 따라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이론을 의심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리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많은 경우 연구자의 실험 수행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퍼즐풀이의 결과로서 전혀 예상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새로움(unexpected novelty)은 앞에서 말했듯이 즉각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X선을 이용하여 찍은 사진 등의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였으므로, 과학계는 이를 완전히 수용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하여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몇몇 주장들은 뢴트겐의 발견이 일종의 속임수라고 말하였다. 이는 결국 뢴트겐의 실험이 어떠한 속임수를 가지거나, 뢴트겐의 능력이 실험을 올바로 수행하는 데에 모종의 영향을 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의 등장은 예기치 않은 새로움이 나타났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으로, 기존 이론을 즉시 전면적으로 폐기하기보다는 과학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보다 손쉽기 때문이다.
결국 뢴트겐의 주장은 정상과학의 관점에서 예기치 않은 새로움에 해당했기에, 그것은 정상과학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나아가 일종의 속임수로까지 생각되었던 것이다.

(12) 토마스 쿤이 말하는 paradigm이 추상적 규칙에 대해 우선성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리하여 설명해보세요.(3점)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패러다임과 추상적 규칙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패러다임으로부터 추상적 규칙을 도출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며, 오히려 패러다임과 추상적 규칙이 불일치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과학자들이 정상과학에 기반한 활동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패러다임의 해석이나 합리화가 성립되지 않더라도, 심지어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더라도 패러다임을 식별하는 것은 가능하다. 결국 패러다임은 완전히 갖추어진 규칙들의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으며, 추상적 규칙과 패러다임은 실제적으로 상호 환원불가능하다.
패러다임의 특징은 공유된 어떠한 규칙보다 ‘유사성에 기반한 네트워크’로 설명될 수 있다. ‘탐구 문제들 및 테크닉들은 유사성과 모델링에 의해서 전체 과학 체제의 이런저런 부분과 연관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에서 단어의 개념을 정의할 때, 어떤 특정한 공유하는 속성을 보기 보다는 ‘가족 유사성’에 의존하여 느슨하게 정의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것에서 공유되는 어떠한 규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느슨한 상호관계인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패러다임은 유지된다. 패러다임은 일종의 표준적 사례들과 변형들, 그것들이 이루는 네트워크이다.
살펴보았듯이 패러다임과 어떤 공유된 규칙은 서로의 관계에서 환원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이론적으로 패러다임의 방식, 즉 네트워크 방식과 유사하다.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날로그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아날로그적 방식이라는 것은, 유사성과 모델링, 패턴에의 인식에 기반하여 네트워크적으로 인간의 인지체계가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인간의 본성적 측면에서 패러다임은 추상적 규칙에 우선한다.
이론적 차원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 차원에서도 패러다임은 추상적 규칙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인다. (1)앞에서도 말했듯이, 패러다임과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하는 어떤 추상적인 규칙, 공유되는 규칙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다수가 동의하는 규칙은 가능할 수 있어도, 모든 과학자가 동의하는 규칙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그리고 과학 교육에도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추상적 규칙보다는 패러다임이 우선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어떠한 개념을 교육제도를 통해 학습할 때에, 우리는 개념을 배운 후 그것에 대한 수많은 예제들을 통해 패러다임 또한 학습한다. 오히려 학습의 중점이 되는 것은 개념보다는 사실은 패러다임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3)그리고 교육이 아니라 연구의 측면에서도,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특정 공유된 규칙에 대한 논의 없이도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퍼즐풀이가 가능하며, 대부분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다. 이는 현상적으로 패러다임이 추상적 규칙에 우선하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4)마지막으로 패러다임을 과학 활동의 기본 단위로 여길 때에만 과학분야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다. 생화학에 대해서 생명과학이 접근하는 방식과, 화학이 접근하는 방식과, 약학이나 화학생명공학이 접근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만일 정말로 공유되는 규칙이 있다면, 각각이 다를 필요가 없으며 달라서도 안된다. 하지만 규칙보다는 패러다임이 실제적으로 우선하기에 학문의 분과와 그 다양성이 가능한 것이다.

(13) 듀엥-콰인 이론과 쿤의 첫 번째 착안점(전형적인 실험 상황)의 연관성을 다음의 사례를 활용·분석하면서 설명해 보세요.(3점)

주어진 사례에서 과학자들은 이론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변칙 사례를 마주했을 때 기다리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관찰의 결과에서 이론과의 불일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제시된 뉴턴이론의 사례에서, 그리고 현실적으로 많은 경우에서(우리가 실험과목에서 행하는 실험 등) 불일치가 발생하더라도 과학적 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일치를 인내한 것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다수이다. 이는 포퍼가 과학의 필수적 요소라고 주장하였던 반증가능성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포퍼에 따르면, 제시된 사례에서의 뉴턴의 이론은 반증하는 근거가 나왔음에도 반증되기보다는 과학자들에 의해 지속되었기에 진정한 과학이 되기에는 그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사실 포퍼의 이론은 과학을 이상화 하였고, 현상이라기보다는 당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는 한계를 가진다. 논리적으로는 결점이 없어보이는 포퍼의 이론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듀엥-콰인 이론과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제시되었다. 듀엥-콰인 이론에 따르면 특정 가설이 검증가능하다는 포퍼의 전제와는 달리 과학적 가설이나 이론이 개별적으로 테스트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특정 이론의 검증을 위한 실험에는 항상 수많은 보조가설들과 초기조건들이 병행하기 때문이다.(holism) 따라서 예상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책임을 테스트하고자 했던 가설이 아니라 보조가설들과 초기조건으로 돌릴 수 있다. 결국 테스트 하고자 하는 가설은 언제나 반증될 위기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토마스 쿤도 듀엥-콰인 이론의 문제제기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정상과학의 탐구과정에서 전형적인 실험을 통해 테스트하는 것은 사실 이론이 아니라 과학자의 능력이다. 과학자의 능력은 듀엥-콰인 이론에서 초기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과학적 사실의 반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 실험에 앞서 이미 예상되는 결과가 존재하기에, 이는 일종의 퍼즐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뉴턴의 사례에서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관측결과가 뉴턴이론에 부합하지 않았음에도, 이론을 문제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을 의심하려는 경향을 주로 보였다. 요컨대 ‘우리가 잘 몰라서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이론이 반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14) 자료 131~133쪽 [comments]에 제시된 비극의 구조 분석 항목(3, 4, 5, 7, 9, 10, 11번 항목. 이외는 제외)에 대응하여 과학 혁명의 구조와 과정을 풀어서 해석해 보세요.(4점)

(3)번 항목
· 비극 = ‘자기 완성의 리듬,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철저하고 비타협적인 투쟁 과정, 인간의 자기완성’
· 과학 혁명 = 정상과학은 스스로의 체계(패러다임)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철저한 관찰을 통해 정밀성을 끌어올려 오차를 최소화 함으로써, 기존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모든 현상을 설명해내는 일종의 자기완성을 추구한다.
(4)번 항목
· 비극 = ‘자기완성이란 자신의 온전한 모습, 자신의 moira가 드러나는 것이다’
· 과학 혁명 = 그런데 정상과학의 완성은 결국 혁명을 통해 다음 정상과학이 등장하여야만 가능하다. 자기완성은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즉 자신의 moira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한데, 정상과학의 한계 규정은 필연적으로 과학혁명을 통해 다음 정상과학이 등장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번 항목
· 비극 = ‘따라서 비극적 파멸의 의미는 비극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신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다’
· 과학 혁명 = 따라서 과학혁명을 통해 이전의 정상과학이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이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정상과학의 한계가 밝혀진다는 것은 그 정상과학이 자기완성을 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과학은 한계에 도달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한다.
(7)번 항목
· 비극 = ‘바꿔말하면, moira를 직면하지 않고서는 자신다움을 완성할 수 없다’
· 과학 혁명 = 즉, 바꿔말하면 정상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아서는 완벽하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뉴턴 역학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극복되기 이전까지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뉴턴 역학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 기존 패러다임으로서의 뉴턴 역학은 제 몫을 확인함으로써 완성되었다.
(9)번 항목
· 비극 =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자질이 오히려 그를 벗어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비극적 결함으로 기능한다’
· 과학 혁명 = 기존 패러다임은 모든 것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성질을 가진다. 하지만 모든 것에 대한 설명 가능성은, 바꿔 말하면 모든 사안에서의 반증가능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정상과학의 엄밀성이 오히려 정상과학이 혁명을 피할 수 없는 기제로 작용한다. 뉴턴 법칙이 엄밀해지면 엄밀할수록, 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로써 반증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10)번 항목
· 비극 = ‘테이레시아스의 등장은 이 문제를 오이디푸스의 내적문제로 바꾸어 놓았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등장으로 인해 자긍심, 존엄성에 침해를 입고 이를 해소하고자 한다’
· 과학 혁명 = 특정한 과학적 관찰이 기존 패러다임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기존의 이론은 자신이 보편적 설명력을 가진다는 주장에 타격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 이론의 지지자는 이론의 보편성을 확보하기위해 보다 엄밀하고 정확한 관찰을 추구하고자 하게 된다. 즉 패러다임의 타당성에 대한 일종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되면, 이를 회복하기위해 보다 엄밀성을 추구하여 이를 해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해왕성의 존재를 찾아내기도 하였으나, 이는 최종적으로는 스스로를 목조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11)번 항목
· 비극 = ‘존엄성이 침해되면 될수록 이에 몰입하나,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이디푸스가 범인임을 드러낸다’
· 과학 혁명 = 정상과학의 보편적 타당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면 될수록, 정상과학의 지지자들은 보다 엄밀하고 정확한 관찰을 통해 정상과학을 옹호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엄밀성을 따지면 따질수록, 정상과학이 가지는 한계가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계가 점차로 드러나면서, 정상과학은 그 보편적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상실하게되고, 마침내 어떤 지점에 이르러 과학혁명이 일어나 정상과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고 만다. 결국 정확한 실험을 시행하여 정상과학을 옹호하고자 한 의도와는 달리, 결국 이러한 실험이 기존의 정상과학을 거꾸러뜨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15)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순환적인 흐름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1.5점)

인간 행위의 성공과 실패는 기본적으로 외부환경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환경이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과, 거기에 더불어 과거의 인간의 행위가 환경에 영향을 미쳐 현재의 인간에게 재귀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적 용어를 차용하자면, fortuna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도 끊임없이 변화할뿐더러, 과거의 행위에 의해서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포투나에 대응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자질은 객관적 인식과 창조적 대응이라는 virtu로서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보수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비루뚜를 가지기가 쉽지않다. 과거에 성공한 기억이 있다면, 이에 보수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고 만다. 따라서 번성한 문명은 쇠락할 수밖에 없으며,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다른 문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문명 또한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쇠락하기에, 결국 문명과 역사는 거시적 관점에서 순환적 흐름을 보인다. 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적 도전과 응전에 맞서, 창조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나, 문명이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인간의 보수적 본성으로부텨 영향을 받는 한 순환적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다.

(16) 페미니즘 과학철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 페미니즘 과학철학은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일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보편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해 보세요.(힌트 : 페미니즘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가 이럴 수 있어요.)(2점)

패미니즘 과학철학의 핵심 요지는, 근대 과학이 남성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과학은 남성적 요소로 인해 특정 정도 편향되어 있으므로, 남성성을 제거하여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패미니즘 과학철학을 넘어서, 패미니즘 자체는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패미니즘의 핵심이 생물학적 결정론(sex)에 대항하여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gender)을 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남성성, 여성성의 gender는 사실 생물적인 요소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길러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식 주체의 인식에서 사회적 문화적 요인의 작용을 강조하기에,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패미니즘 과학철학에도 이러한 관점은 그대로 적용된다. 기존의 과학이 남성성이라는 특징을 띠는 방향으로 사회 맥락적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패미니즘 과학철학은 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진다.
그런데 현 상태가 젠더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점은, 여성의 삶에 기반하여 과학이 이루어진다면 보다 객관적인 어떠함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패미니즘 과학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강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남성적 객관성’의 성취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도, 또 그것이 태생적으로 가지리라고 생각되는 gender적 편향성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적 객관성을 인식적으로 내포하면서, 여성성으로 균형을 맞추어 새로운 객관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며 동시에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17) 가짜과학의 사례를 한 가지 들고, 자료 153~157쪽의 개념들을 사용해서 분석해 보세요.(수업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2.5점)

가짜과학이란 포퍼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반증가능성의 논리로 무장한 연역적 진짜과학과는 달리, 가설연역의 귀납의 논리로 기만적인 주장을 펼치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짜과학에 정확히 부합하는 예로서, 창조과학 또는 지적설계론(이후 편의상 창조과학으로 통칭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1)창조과학은 경험적 문제를 설정하거나 포함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경험적 문제를 무시한다. 창조과학에 부합하지 않는 증거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하리라고 착각)한 증거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젊은 우주론은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에 가깝다는 증거가 아무리 제시되더라도 이를 무시하고, 우주의 나이를 6000년이라고 단언한 뒤 이를 입증한다고 착각하는 그릇된 근거만을 고집한다.
(2)창조과학의 근본적 특징 중 하나가 ad hoc 가설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ad hoc 가설은 설명되지 않는 사항을 위해 도입되었으나, 아무런 검증도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우주적 인력을 설명할 때 일종의 소용돌이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가설 설정을 거부하였던 것에 비해 전형적인 ad hoc 가설이었다. 창조과학, 특히 지적설계론은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사실은 그릇된) 주장을 펼치면서, 기존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초월자의 개입’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초월자의 개입이야말로 검증불가능한 전형적인 ad hoc임은 명백하다.
(3)사실 놀랍게도 창조과학은 유사성의 측면에서는 비판할 측면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는 창조과학이 과학적 설득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창조과학은 사실 어떠한 과학적 주장을 성립하기보다, 기존 과학(사실 개 중에서도 진화론)이 틀렸음을 주장하는데에 집중한다. 이들의 주장은 결국 ‘진화론이 틀렸으므로, 창조론이 맞다’이다. 창조론이 맞다는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논리이므로, 어떠한 주장에의 입증근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유사성에 대한 진술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4)나름의 학회를 구성하기는 하였으나(한국창조과학회도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성을 가지는지는 의심스럽다. 여기에서 사회성은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전제로하는 비판과 수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기능을 창조과학회는 수행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각각 자기가 하고싶은 주장을 게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소통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다. 그리고 사실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주체는 각 교회의 목사들인 경우가 많고, 목사들은 많은 경우 창조과학회에 올라와있는 자료를 그대로 긁어 말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기에 실제적으로 그들끼리의 사회성이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5)창조과학이 절대적으로 부재하는 것 중 하나가 역사성이다. 창조과학이 아무리 과학의 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시발점은 성경이다. 성경에의 의존이야말로 전형적인 비역사성의 표본이다.

(18) “인간의 모든 행동은 심리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컨대 부모님을 효도 여행 보내드리는 것도, 부모님 돌아가신 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심리적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이 주장의 이론적 지위를 평가해 보세요.(2.5점)

심리적 이기주의는 전형적인 가짜과학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경우를 설명하지만, 아무것도 말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험적인 문제를 전혀 포괄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A라는 행동을 한다면, 심리적 이기주의는 ‘그것은 그 사람이 A라는 행동을 하고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싫어하는 듯 보이면서(혹은 표현하면서) A라는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이기주의는 ‘그것은 그 사람이 A를 싫어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A를 하고싶어하므로 A를 하였다’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어떠한 선호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결국 행위 A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항상 A라는 것을 하고 싶어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형적인 순환논리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A를 한 것은 A를 하고싶었기 때문이며, A를 하고 싶었다는 것은 A를 하였기에 알 수 있다. 따라서 심리적 이기주의는 논리적으로 성립하는 주장이 아니므로 사실 진짜과학은커녕 학문에도 끼지 못한다.
A가 순환논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A는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과학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임의의 행동 a(∀a)를 할 때, 그 행위의 동기는 항상 a에 대응되는 a´이다. 다시말해 어떠한 경우를 제시하더라도, 심리적 이기주의는 반증될 수 없다. 항상 그 행동은 그 동기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증가능성이 없으므로, 이는 전형적인 가짜과학임이 분명하다.

(19) 순환 논리가 등장하는 상식적 설명의 사례 한 가지를 들고 분석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지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우리가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순환논리 중 하나는 성격테스트이다. 이 때에 성격 테스트는 신문이나 인터넷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조악한 형태 뿐만 아니라,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다고 여겨지는 MBTI검사 등 또한 포함한다. 성격테스트는 결국 ‘인간의 어떠한 행위를 관찰하거나, 아니면 행위에 대한 증언에 기반하여, 그들이 ’바로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정말로 어떤 테스트가 우리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테스트는 관찰이나 증언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격이 어떠함을 밝히고자하는 것은 결국 ‘A라는 사람은 B처럼 행한다’라는 명제를 말하고자 함인데, 이것의 근거로 ‘왜냐하면 A는 B처럼 행동했기(답변했기) 때문이다’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넷 등에서 설문 끝에 ‘OO님의 성격은 AA형태입니다’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전형적인 순환논리일 것이며, MBTI등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성격검사의 목적이 단순히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에 있지 않고, 이로부터 어떠한 추가적인 의미를 이끌어내거나 조언을 하고자 함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성격검사의 기본적 목적이 그 사람의 성격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에 있다면, 이는 전형적인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 “(일반적 의미에서) 생명 활동이란 곧 자기보존 활동이다.” 여기서 ‘자기보존 활동’이란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보세요.(2.5점)

모든 물리현상은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과학적 주장이고, 이는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현대과학은 기본적으로 환원적 관점을 취해, 생명현상 또한 물리현상으로 근본적으로는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을 일반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명체 또한 엔트로피의 증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즉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무질서한 방향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생명체는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은 엔트로피가 증가해 무질서로 이행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자기보존 활동이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열린계(고립계와 반대되는 개념)이므로, 외부로부터 에너지 또는 질량을 흡수함으로써 엔트로피를 억제한다. 엔트로피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엔트로피가 자연적으로 증대하는 수준보다는 더 빠른 속도로 에너지와 질량을 흡수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자기보존 활동은 외부로부터 에너지의 흡수이며, 이것은 시스템을 단순히 고수하는 것으로 달성된다기 보다는 시스템을 흐름 속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달성된다. 생명체의 질서는 끊임없이 유지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대체되고, 파괴된다. 생명은 어떤 고정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흐름인 것이다. 생명은 물질이 흐르기 위한 어떠한 그릇이라기보다,(이 경우 그릇은 온전히 보전되고 흐르는 것만이 변화한다) 흐름 그 자체이다. 이러한 흐름이야말로 엔트로피를 억제하여 생명체가 자기보존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는 언어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용어가 바로 ‘동적 평형’이다.

(21) 그레고리 맨큐는 『맨큐의 경제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서술과 주장은 전형적인 가짜과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점에서 근본적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그 중 한 가지는 자료 “대학과 공부” 참조) 이 문항에서는 토마스 쿤이 제시한 paradigm 개념을 통해서 위 주장의 오류를 지적·설명해 보세요. (힌트 : paradigm 개념은 우리가 인간의 인식, 인지, 판단, 의사결정 등에 대해 잘못 생각해 왔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3.5점)

제시된 맨큐의 주장은 우선 심리적 이기주의와 동치라는 점에서 오류를 가진다. 맨큐는 결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이기주의가 가지는 오류는 앞의 (18)번 문제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간략히 말하면, 맨큐의 주장이나 심리적 이기주의나 마찬가지로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반증가능성이 없다.
또 다른 오류로, 맨큐는 인간이 의사결정을 할 때에 여러 대안을 만들고 이를 비교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보았다. 이는 ‘합리적 선택 기법’이라고 불린다. 합리적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사유이다. 하지만 통념과는 달리 합리적 선택 기법은 효용성을 가지지도 않고, 인간이 실제로 따르는 규칙 또한 아니다. 사실 인간은 직관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말하자면 인간의 의사 결정은 ‘대안탐색 -> 최선의 수 선택’이 아니라, ‘결정 선택 -> 정당화에 필요한 이유 선정’의 과정을 거친다. 직관에 따른 판단 과정은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합리적 선택 기법보다도 우위에 있을뿐더러, 실제적으로도 보다 근본적으로 수행되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대안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는 맨큐의 의사 선택에 대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를 담지한다.
그런데 인간이 합리성에 근거하여 여러 대안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선택을 내리고 그 동기는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추상적 규칙에 이론적, 현실적으로 우선된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와 증명은 우리가 이미 (12)번 문제에서 다루었다. 패러다임과 규칙은 상호 환원 불가능한 관계에 있으며, 그 중 패러다임이 오히려 우선성을 가진다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추상적 규칙과는 대비되는 측면에서, 패러다임은 표준적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이 이루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과학 활동에서 실제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패러다임이지 추상적 규칙이 아니다. 추상적 규칙은 다만 사람들에 의해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일 뿐이지, 현실 세계는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된다. 패러다임에 의해 현실이 지배받는다는 것은 결국 과학적 판단에 있어서 어떠한 원리가 일관되기 적용된다기 보다는, 네트워크적 판단, 다시 말하면 직관이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의 실제적 예로, 상대성이론을 들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주장했을 당시에는 사실 경험적 증거에 의해 입증되지 않은 상태였다. 입증증거, 혹은 포퍼의 용어를 빌리자면 ‘강화하는 증거’가 없었음에도, 과학자들이 느꼈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미적 가치와 타당성에의 직관은 상대성이론으로의 패러다임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에딩턴의 실험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경험적 근거를 확보하였으나, 이전까지는 과학자 집단의 모종의 ‘선호’에 의해 주장되었던 측면도 없지 않다. 이러한 선호야말로 인간 집단의 판단이 네트워크적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에 대한 역사적 입증근거이며, 인간 개인 또한 네트워크적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직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패러다임에서 드러나는 네트워크적 사고구조에 의존한 직관이야말로 현실적인 것이고, 맨큐가 전제하는 합리적 선택 기법은 추상적 규칙일 뿐 현실적인 것이 아니기에 맨큐의 주장은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