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철학적 이해 중간보고서

Written on January 8, 2014

(1) ‘자기중심성’의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심리적 자기중심성의 사례로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사물에 인간성을 대입하여 사고하는 행위이다. ‘나무를 자르면 나무가 아파한다’등의 사고가 전형적이다. 나무는 별도의 감각기관이 존재하지 않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자신)을 기준으로 보아 사고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이 환경보호 등의 필요성을 위해 오류를 감소하고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문장에서 위화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심리적인 자기중심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물에의 인간성 대입이 문화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니미즘은 자연물에 어떠한 영혼 혹은 인성이 깃든다는 주술적 믿음으로,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요소이다. 게다가 설령 자연물의 ‘정령’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어떠한 것을 할 연유는 전혀 없으나, ‘인간중심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진다는 점에서 애니미즘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이중적으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2)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 및 위치이며,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과학 이론의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왜 그런지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2점)

수업시간에 간단하게 나오긴 했지만, 다윈으로 인한 과학적 자기중심성 탈피가 중요성에 비해 짧게 다루어졌다고 생각되어 구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을 신의 형상을 닮은 특별한 창조물로 보아, 세상의 중심으로 사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윈은 인간이 다른 유인원, 더 나아가 다른 생명체들과 조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밝혀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우주에서 인간의 중심적 지위를 박탈하였다면, 다윈은 신의 아들로서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던 인간의 지위를 박탈하였다. 진화론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신의 사랑받는 피조물이라기보다 동물에 가까워 보였고, 이러한 사실을 직면한 인류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아중심성으로부터의 고통스러운 탈피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통을 감내하기를 회피하고 인식적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인간의 신적인 중심성을 회복하기위한 시도를 동기로하여 이루어지는 대표적 주장이 ‘창조과학’이다. 창조과학은 스스로를 과학으로 자인하면서, 신의 섭리를 과학으로 증명해 인간의 실존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설명의 타당성이 매우 부족하여 유사과학으로 생각된다. 지적설계론이라는 보다 세련된 주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설득력이 매우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설득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창조과학이 맨 처음 발흥한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사과학-유사신학’인 창조과학을 신봉하고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물밀 듯이 유입되어 많은 신앙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고있는 상황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가 가져오는 심리적 고통, 믿음에의 의심으로 인한 신앙적 고통을 많은 사람들이 이겨내기보다 회피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피하고자하는 경향성에 의존하기에, ‘신앙적 자기중심성’이 단시일내에 혁파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3)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에 해당하는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왜 그런지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점)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관점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성적 경향을 가지기에 베이컨이 언급한 ‘우상’을 숭배한다. 그 중 시장의 우상이란 잘못된 언어사용으로부터 오는 편견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 간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요즘 이슈가되는 ‘일베’등의 사이트의 담론을 관찰해보면 ‘여성혐오’에 대한 왜곡된 담론에서 시장의 우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왜곡은 정정되기보다는 재귀적 악순환을 거쳐 심화되어, 완전한 우상으로 자리잡아서 점차 공고화된다. 특히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의견만 접하고자하는 인간의 심리적 편향과, 소속을 바꾸는데에 드는 비용이 거의 없고 여러 곳에 동시에 소속되는 것이 용이하다는 인터넷의 특성이 결합하여, 동일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유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론의 악순환이 가속회되고, 자정작용의 가능성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분석될 수 있다.

(4) ‘사실과 가치의 혼동’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점)

사실과 가치의 혼동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희랍의 초기 철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 즉 질료라고 보았고, 이러한 질료로부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침탈’과 ‘응보’로 상정하였다. 예를 들자면 여름이 끝난 후 겨울이 오는 현상은, 더움의 요소가 여름동안 침탈을 한 것을, 타 요소가 응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이라는 사실적 요소를 침탈과 응보라는 가치로서 설명하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사실과 가치의 혼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4원소론을 주장한 엠페도클레스 또한 사실과 가치의 혼동을 범했다. 그는 근원적 질료를 4원소로 보았는데, 이러한 4원소가 이합집산하게 하는 원동력을 사랑과 미움이라고 말했다. 사랑이 클수록 이 원소들은 하나로 뭉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미움이 클수록 원소들이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였다.

(5) ‘자연주의의 오류’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자연주의의 오류는 사실로부터 당위를 추론하는 것으로써, 경험적 진술에서 규범적 진술을 연역할 때 생기는 논리적 오류를 뜻한다. 자연주의의 오류는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앞에서 과학적 자기중심성의 탈피의 사례로 다윈의 종의기원을 들었는데, 진화론에 반하는 신학적 주장에서 자연주의의 오류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면(사실 잘못된 인식이다),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질서는 무의미해 질 것이다’는 우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자연주의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조상이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앞선시대의 생물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윤리와 질서가 무의미하다는 당위가 나올 수는 없다. 인간이 설령 생물체가 아닌 어떠한 것의 후손이더라도, 또는 정말로 신의 창조물이라도 윤리와 질서는 이러한 사실과 별개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논쟁을 떠나 인간은 현재 존재하고 있고 이를 지속하기위해서는 윤리와 질서가 추구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윈을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연주의의 오류에 기대어 인간의 윤리를 회의하는 비인간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6) ‘인지부조화’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인지부조화’란 ‘이미 이루어진 행동과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태도가 서로 불일치할 때’ 이를 합리화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NL계열 정치단체는 주체사상이 인간중심적·민족적·자주적이기에 수용해볼만 하며, 주체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북한의 정체가 남한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 정치체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러한 주장은 남한의 사회적 수준이 북한을 추월하기 이전, 또는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기 이전에는 가능했을 수도 있으나, 오늘날 북한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타당성이 매우 의심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였더라도, 다시말해 인지부조화를 겪었더라도 NL계열의 태도는 자기합리화로 인해 별로 변화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수업에서 제시된 ‘사난다교’에 유비해볼 수 있다. NL단체들은 북한의 이념이 바람직하기에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해 왔으나(멸망을 예언하였으나), 실제로 밝혀진 북한의 현실은 매우 참담하였다(멸망은 오지 않았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응하는 합리화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인데, 첫 번째는 북한의 실상에 대한 현재의 인식이 남한 또는 미국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마저도 ‘진정한’ 주체사상을 실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자신들이 기도하였기에 멸망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두 주장 모두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에 따른 자기합리화의 예임을 알 수 있다.

(7) ‘손실혐오’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 분석·설명해 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손실혐오’는 일상적인 영역에서 쉽게 관찰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이 비싸게 산 물건을 다시 되팔 때, 자신이 산 가격을 고려하여 손해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연구로 크리스토퍼 메이어의 “손실회피와 판매자의 행동”이라는 논문을 살펴보면, 비싼 가격에 공동주택을 구매한 사람들은 이 가격 이하로 즉 손해를 보고는 다시 판매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심리적 편향(휴리스틱)으로 인해, 수요의 부족-공급의 과잉 상태에서도 가격의 하락이 일어나지 않아 부동산 침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손실혐오의 존재는 사회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생물적 차원에서도 증명되었다. 사람은 이득과 손실이 50/50의 확률로 벌어지는 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는 뇌를 fMRI로 촬영하는 방법으로 이유가 설명되었다.
결국 손실혐오는 인간의 보수성을 야기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현재의 것을 지키는 것’(주택의 보유)과 ‘현재에서 변화하는 것’(주택 판매)의 선택지를 마주한다. 그런데 변화의 경우, 현실적으로 손실의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손실혐오라는 본성을 가진 인간은 변화보다는 보수로 기울 개연성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8) ‘매몰비용 효과’, ‘인지부조화’, ‘손실 혐오 본능’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해 보세요.(1.5점)

손실 혐오 본능은 인지부조화(그리고 자기합리화)와 매몰비용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심리적 기반이 된다. 인간이 손실을 혐오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에, 행동과 태도의 부조화를 자각하는 순간 이를 합리화하는 기제를 발동시켜 손실을 회피하는 것이 인지부조화에 의한 자기합리화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매몰비용 효과 또한 손실 혐오 본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기존에 투입한 자원이 있고, 만일 중도에 포기한다면 그 자원은 ‘손실’로서 간주될 것이기에 인간은 손실 혐오 본능에 따라 포기하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매몰비용 효과와 인지부조화도 모종의 관계를 가진다. 많은 경우 매몰비용에 대한 두려움이 인지부조화와 합리화를 야기한다. 이미 일어난 매몰비용의 상황 또는 행동에 대하여, 태도를 이에 적합하게 바꿔 버리는 것이다. 사실 실제 현상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주식투자를 하고 그 주식이 손실을 입었을 때, 팔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손실 혐오 본능에 의거하여 매몰비용을 상실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팔지 않고, 손실회피에 따른 행위를 합리화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는 매몰비용을 회피하고자 합리화를 하는 것이라고 분석될 수 있다.

(9) “이제까지의 삶에 만족하는가?”란 질문에 대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등등 사이에, 삶의 만족도에 있어 일반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조사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해보세요.(2점)

주어진 조사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몇몇 가설을 세워볼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재산과 지위의 차이라는 실질적 현상의 측면이 삶의 만족도라는 인식적 측면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또는 재산과 지위의 차이가 야기하는 만족도가 아닌 다른 결과가, 다시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주어 만족도의 변화를 상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배운 내용을 적용해보자면 전자의 가설이 설명된다. 설문의 평가 대상이 되는 ‘이제까지의 삶’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만족도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손실 혐오 본능이 작용할 여지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손실을 회피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역으로 가능한 ‘손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미 일어났던 일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상황이 ‘손실’이라는 규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인지부조화에 따른 자기합리화 기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과거에 이미 일어나버린 상황에 맞추어 현재의 태도를 재조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산과 지위의 격차라는 실질적인 조건의 차이가 응답자의 삶의 객관적 행복 지표가 달라지게 했으리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가 유사하게 나오는 것은 손실회피본능에 따른 인지부조화-자기합리화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재산과 지위의 차이가 야기하는 제3의 변인이 또다시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적 가능성은, 수업시간의 내용으로 직접 설명하기는 힘든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수업 외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설명해보자면, 많은 부 또는 높은 지위라는 요소가 ‘가정의 화목’, ‘시간적 여유’ 등 또다른 만족도의 요소에 작용하여, 또는 부와 지위가 길항적으로 작용하여, 객관적 지표에서의 격차를 상쇄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10) 모든, 망한 기업들의 공통적 특징을, 수업을 통해 배운 개념을 적용하면서 설명해보세요.(1.5점)

망한 기업들의 공통적 특징을 뽑아내려면, ‘망한’과 ‘기업’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기업이라는 것은 대체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의 경쟁에서 이윤창출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고, 그것이 망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 기업을 지탱할 동기가 사라졌다는 것, 다시말해 추가적 이윤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이윤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업에게 있어서 최고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최악의 상태이다. 결국 망한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견디지 못하였음을 특징으로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최악의 경우를 견디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많은 경우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기업이 최악을 대비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손실 회피 본능이 있다. 손실회피본능은 이미 일어난 사건뿐만 아니라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도 적용되어, ‘앞으로 가능한 손실’에 대해서 고려하는 것조차도 방해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기업이 재귀적 악순환에 빠지도록 하여, 손실에 대해 고려하는 것을 억제하여 대비를 더욱 어렵게 한다. 결국 대부분의 망한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손실회피본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여, 최악의 상황에의 대비가 허술하였고, 이러한 상황이 점차 강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1) 근대 서구가 추구하던 합리성(rationality)이 어떻게 해서 비합리성(광기)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설명해보세요.(1점)

서구가 추구하던 합리성은 결국 자기보존적 측면에서도, 자기실현적 측면에서도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합리성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비인간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빈곤, 경제불안, 인간소외, 전체주의, 인종주의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각각의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이 공통점은 있으나 동일하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수업시간에 계몽주의와 계몽대상의 보수성의 연합작용으로 인한 인종주의의 등장을 비합리성의 대표적 예로서 배웠고, 또 다른 측면을 예로 들어보자면 빈곤의 확대가 있다. 자기보존적 행복을 추구하기위한 수단으로서 도입된 자유 시장 경제 및 산업화는 가격 경쟁력을 위한 저렴한 생산비용에의 유인을 강하게 가졌다. 이로 인해 노동력에의 보상을 감소시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러한 시도는 국제적 차원에서는 국가간 빈부격차를, 국내적 차원에서는 계층간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데에 일조하여 비합리성이 나타나게 하였다.

(12) 20세기 후반이 이른바 ‘상대주의의 시대’가 된 이유를 설명해보세요.(1점)

20세기 전반기에는 현대성의 모순이 여러 형태로 분출되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1,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이는 기존의 보편주의적 가치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시행된 국제연맹 같은 시도는 철저히 무위로 돌아가거나, 오히려 좋지 않은 방향으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비 서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타 문화가 가지는 비서구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될 기반이 마련되었다. 기준, 가치, 의미가 모두 상실된 ‘상실의 시대’의 끝에서, 그리고 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는 시점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환으로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을 ‘상대주의의 시대’라고 명명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지배적인 사상은 모더니즘이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13) ‘문화상대주의의 역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보세요.(1.5점)

문화상대주의는 기본적으로 타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혹은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문화상대주의는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목적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쉽다. 표면적으로는 타 문화에 대한 인정을 목표로 하나, 이면적 작용을 통해 오히려 문화 간 경쟁에서 철저히 힘의 논리가 작용하도록 하고 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문화 간 갈등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문화상대주의는 바람직한 해결을 위한 어떠한 방안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해결의 방안조차 원리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호존중이라는 이상은 실존하는 갈등 앞에서 공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갈등의 평화로운 종식은 쉽지 않으며, 오히려 갈등을 중재하는 과정을 간과함으로써 전적으로 힘의 논리에 의해 경쟁의 결과가 결정되도록 하고 만다. 힘의 논리는 단순히 무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언권의 차이에서부터 실질적 행동력까지 다면적으로 작용하여 약자의 주장을 굴복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문화상대주의는 스스로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타 문화의 존중과 보전이라는 목적을 오히려 파괴해버리는 역설을 가진다.

(14) 다른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올바른 이해)에 해당하는 사례를 한 가지 들고, 왜 그런지 설명해보세요.(수업 시간이나 자료에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1.5점)

다른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적 사고를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극단적으로 상대주의적인 사고 또한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제국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에는 익숙하나, 상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상대주의적 사고 또한 비판의 여지가 상당하다. 특정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여성 할례라고 하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인도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은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고 있다. 서구 또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KKK나 AOG(Army of God,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단체)가 자행하는 인종, 종교 테러로 인한 인명피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한다면 이들에게 어떠한 비판도 제기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맥락과 이유에 따라, 상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상대주의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러한 극단적 상대주의 또한 발언권이 그리 크지는 않아 보인다. 국제사회 및 NGO 등이 인도 및 이슬람 국가들의 여성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하거나 비판하고 있으며, KKK나 AOG의 테러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기위한 움직임은 바람직하며, 바람직하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고, 실제로 다양한 측면에서 실현되고 있다.

(15)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수업시간에 배운 개념을 적용해서 풀이해 보세요.(1점)

인지부조화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행동에 맞추어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먼저 행동을 하고, 그 후에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생각을 하고 행동하여야만 최대한 인지부조화에 맞닥뜨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 본 문장의 의미이다.
자연주의의 오류의 개념으로도 유사한 맥락에서 본 문장의 의미를 풀어낼 수 있다. 인간이 먼저 행동을 하고 이를 정당화함에 있어서, ‘나는 그렇게 행동한다’라는 사실명제로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해야한다’라는 당위명제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실로부터 당위가 나오는 자연주의의 오류가 발생한다. 따라서 본 문장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먼저 당위를 세우고 이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16) ‘자연주의의 오류’ 및 ‘무지에의 호소 오류’ 등 논리적 오류가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결과는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2점)

자연주의의 오류란 사실에서 가치를 이끌어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주의의 오류가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은 매몰비용의 효과이다. 기존에 이미 가치를 투입하였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해당 사항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당위가 산출되기 때문이다. 매몰비용의 효과는 국가 정책에 작용할 때 강력한 사회적 결과를 야기한다. 대표적인 예로 4대강 사업을 생각해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시공을 시작하고 나서는 매몰비용의 효과를 활용하여 계속적인 공사의 진행을 정당화 하였다. 이미 공사를 시작하였고 예산을 투입하였기 때문에 지금에서 공사를 중단하고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매몰비용 효과, 크게는 자연주의의 오류로서 성립하지 않는 주장이다. 결국 4대강 사업은 매몰비용 효과를 등에 업고 끝가지 추진되어 사회적 손해를 야기했다.
무지에의 호소 오류는 ‘어떤 것이 증명되지 않았음’으로부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한다. P라는 명제의 옳고 그름이 판단될 수 없기에, P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눈박이 괴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허용된다면, 누군가 가능성을 끝없이 마구 제시함에 따라 그 가능성을 모두 인정해야하기에 사회적 불편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외눈박이 괴물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되지 않는 예이지만 ‘사회적 혼란은 유대인 때문이다’ 식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러한 주장이 무지에의 호소 오류를 등에 업고 펼쳐진다면 이로인한 사회적 함의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지에의 호소 오류는 논리적 결함이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의 부정적 영향력 또한 간과할 수 없기에, 주장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 방법으로 충분히 제한될 필요가 있다.

(17) 인간의 오류가능성은 상대주의(회의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 보세요.(1점)

인간이 오류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인간은 신적인 관점, 혹은 전지적 관점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상대주의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서 인식적 차원의 진리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은 생각해볼 수 있으나, 존재적 차원의 진리가 부재하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인식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은 분명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오류가능성으로부터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는 도출되지 않는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오류가능성이 상대주의의 근거가 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인간은 대부분 사회를 구성하여 생활하고,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관점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점을 공유하는 탐구공동체의 형성은 인간이 오류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객관으로 수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절대적 객관은 아니더라도, 객관에 수렴하는 상호주관적 관점은 점진적·제도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18) 상대주의는 왜 진보주의의 사상적 바탕이 될 수 없는지 설명해 보세요.(1점)

상대주의는 기본적으로 보수성을 담지하기에 진보주의의 사상적 바탕이 되기 어렵다. 상대주의가 일반적 통념과 달리 보수성을 가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맥락적이기에 보존되어야 한다(즉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맥락에 따라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므로,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대주의의 강령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를 공고화 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진보는 이와 달리 반드시 과거의 것을 탈피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진보주의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그 필연적 보수성으로 인해 변화를 반드시 필요로하는 진보주의의 사상적 바탕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공존마저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