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후역사1 (국제정치학 예습과제 09)

Written on October 17, 2013

Q. 분단이후 전두환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A. 분단은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고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며 분단당사자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한국전쟁결과 남북간 이념 정치대립이 가속화되고, 통일성이 와해되며 남북에서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70년대에 들어서는 남북협상기류가 조성되었다. 이는 당시 닉슨행정부의 중국에 유화적인 외교의 영향으로, 남한과 북한은 이로부터 모두 불안감을 느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남북은 상호 협상을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하지만 서로 이로부터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화해분위기를 기반으로 남한에서 박정희는 장기 독재 집권을 시도하였다.(유신) 이는 당시 미국의 대선기간을 이용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다. 남북 모두에서 남북대화는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북한은 특히 이를 활용해 서방국가들과 교류를 맺는 데에 성공한다.

육영수 여사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남북대화 분위기는 반전된다. 남한은 일본과는 문세광에 대한 사과문제로 갈등이 생겼으나, 미국의 중재로 무마된다. 이 와중에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북한이 굴착한 땅굴이 발견되면서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북한이 남한을 침범하려는 의도로 남한과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북한은 당시 미국의 월남전 패전을 보고 정말로 적화통일 의도가 있었으나, 중국과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이는 당시 소련과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도 미국의 안전보장의 불확실성을 계기로 핵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결국 핵개발은 좌절된다. 이때 판문점 도끼 살해사건이 벌어지는데, 미국은 전쟁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선에서 그친다.

카터가 당선된 이후 선거공약이었던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놀랍게도 철수를 수용하는대신 보상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내 철수반대의견이 강하여 결국 카터는 철군규모를 축소하였다. 북한은 최초에 카터에 대해 기대를 걸었으나 점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당시 중소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북한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외교를 시도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이후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다. 이 과정에서 남한이 과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성장하여 미국이 일방적으로 제어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쿠데타과정에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광주민주화운동에서도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지속적인 압박을 취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거기에 김대중 석방을 대가로 전두환은 새로 당선된 레이건정부로부터 정당성을 승인받는다.


자료 정리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pp.40-60.
스탈린은 미군 철수, 중공 통일 방치, 에치슨라인, 스파이정보 등을 종합해 남한 침범에 관심을 보임. 김일성의 호언장담.
김일성은 소련 아시아계획의 일부였음. 호치민도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 축출. 유럽에서의 후퇴를 만회하려는 시도임. 소련이 직접 참여하진 않고 원조만 함. 각 국가가 통일을 명분으로 함(한국, 베트남). 중국은 공산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지를 얻고자 적극적으로 응함.
미국은 이를 진주만에 준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임. 전후 집단안보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 2차대전 발발 직전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 유엔 활용 방어전 전개.
소련은 간과한 사항이나 일본에 주둔군이 있엇고, UN에 veto를 가진 국가가 없었음.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쉽게 진군함.
당시 스탈리는 미국과 국경을 맞대는 것을 꺼리지 않음. 중국은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이미 병력을 이동시킴. 개입의지. 미국은 중국의 개입을 경계하며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압록강까지진군하지 말라고 함. 중국과 국경을 맞대지 않으려 함. 중국개입을 견제. 마오쩌둥은 혁명동료를 설득하여 참전. 개입의지 강함.
미국은 중국 개입 이전에 승리했다고 생각했음. 하지만 중국이 개입
2차대전의 결과는 안보를 보장하지 못했음. 승전국조차 불안해함. 승전국끼리 이익이 불일치하고 이데올로기가 달라 서로 의심함.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심화. 미국도 메카시즘 등으로 인해서 관용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국가에서 기밀, 안보가 최고가치가 됨. 두려움에 기반. 비관적 미래예측이 지배적.
중국의침공에 대해 미국은 핵 사용을 고려함. 하지만 결국 사용하지 않고 제한전을 펼침.
결국 전쟁에서 서로 핵을 사용하지 않았음.
무기체계는 지속적으로 진화해옴. 핵무기의 등장. 전면전으로 국가 전 영역이 영향을 받고 핵으로 인해서도 전국가가 영향범위가 됨. 과거에 비해 살상력이 증대.
국가는 안보를 유지하려 하는데, 핵전쟁은 국가 그 자체를 역으로 위협. 자기방어적 무기가 오히려 국가를 파괴함.
총력전의 위험성. 1차,2차대전에서 드러남.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무기는 만들어지면 사용되었음. 핵무기도 만들어지고나서 그 쓰임새를 찾은 것. 기술은 발전했으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비극.
그런데 핵전쟁은 아직 발생하지 않음. 히로시마가 마지막이었음.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변화함. 핵전쟁은 억제됨.
이러한 핵억제는 지도자의 리더십 덕분. 트루먼은 핵의 위험을 직시했었음. 전쟁에서 항상 무기의 사용은 군에 위임되어 있었음. 트루먼도 히로시마 원폭은 지시한건 아님.
트루먼은 핵의 사용과 발전이 시민사회의 제어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됨. UN에 그러한 권한을 부여하려고 시도하였었음.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시기의 조건을 명시하지 않음.
제식무기와 협동성이 떨어지고, 소련으로부터 어떻게 협력을 이끌어낼지에 대한 방안이 없었으며 팬타곤조차 잘 알지 못했지만 의미있음.
전쟁에 대한 민간감시체계 수립시도. 트루먼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는데에 성공함.
핵이 아니었으면 유럽은 적화되었을 것. 이렇게 되었다면 스탈린의 의도가 핵전쟁 발생의 중요점이 되었을 것.
스탈린이 핵폭탄의 위력을 깨닿고 야망을 억제하길 기대. 하지만 소련도 핵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짐. 핵을 UN통제하에 두자는 미국의 제안 소련 거부. 소련내 핵시설 조사를 거부함. 미국의 선제공격을 두려워함. 그러나 이는 필요없는 걱정이었음.
베를린 봉쇄에서 미국인들이 탈출할 때 소련은 이러한 두려움으로 이를 허용. 드레스덴에서 강력한 화력을 선보인 바 있음. 미국과 전쟁이 난다면 러시아의 여론이 뒤집혀 실각할것이라고 생각.
소련은 미국을 몹시 두려워 했음. 소련의 두려움을 숨기려는 허장성세를 펼침. 비협조적 태도. 이로인해 미국이 핵독점의 성과를 누리지 못함.
소련이 핵 개발후 소련도 핵폭탄의 위험성을 인식. 미국과 유사하게 핵전쟁의 위험 경계. 핵자체의 특성임. 소유자를 반전주의로 만듬.
중국의 침공에 미군한국군이 밀려남. 미국 당시 369개 핵, 소련 당시 5개 핵 보유. 압도적 우위. 그러나 사용하지 않음. 만일 유럽이 침공당했다면 사용했을 것.
무엇을 타깃으로 해야하는지 부정확했음. 원래 도시타격목적인데 중공군은 그냥 도보로 침공함. 중국도시를 노린다고 해도 정치적인 부작용을 고려할 때 문제가 있음. 동맹국들의 반발 예상.
또한 핵을 사용할시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문제.
다른 문제는 그곳의 군사적 상황. 당시 전선은 휴전선근처 교착상태. 외교적 가능성이 보이고 있었음. 따라서 핵사용은 유보. 전쟁의 확장을 꺼림.
스탈린은 북한의 침략을 방조하고, 중국의 개입을 조장하였으나 정전에는 동의함.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에 묶여있기를 바라면서 협상을 질질 끔. 스탈린이 죽고야 정전협정.
미국과 소련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충돌. 냉전중 유일한 시기. 서로 간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었음.

D. Oberdofer, 두 개의 한국, pp.21-219.
1장
1) 철새들의 보금자리 DMZ
엄청난 군사지역. 비무장지대에 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대감을 상징. 그러나 희망이 싹트느 곳이기도 함. 서로 만나서 합의할 때 판문점 이용.
2) 분단의 시작
소련의 북한 주둔, 미군의 남한주둔. 잠정적으로 38선 분할. 분단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음.
3) 한국전쟁과 그 여파
소련군과 미군 철수. 북한군의 남침. 미국의 정책이 군비축소에서 소련의 팽창주의 저항 재무장으로 변경되는 계기가 됨. 미국과 중국의 갈등 발생. 소련과 중국의 동맹 발생. 한국내 이념과 정치적 대립이 뿌리깊게 내림. 통일성 와해. 독재정권의 성립.
4) 남북협상의 기원
미국과 중국의 우호관계(닉슨, 키신저. 월맹 견제 목적. 남북모두 불안해함). 이에 남북간 협상이 급속히 타진됨. 북한은 중국불신, 남한은 미국 불신. 미군의 철군 등 요인. 상호 비밀회담 추진. 이후락의 방북.
5) 김일성
항일투쟁. 소련의 선택을 받음.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 중국과 소련과 복잡다단한 관계. 중국과 소련에 의지하나 지배력은 경계. 실용주의. 주체사상. 한반도를 선택된 나라로 간주. 인간중심의 세계관. 집단의식을 바탕. 종교집단과도 같은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폐쇄적 국가.
6) 남북대화 개시
7.4공동선언. 박정희는 미군철수나 통일을 기대하지 않음.
2장
1) 시작과 종말
지도부는 대화에 회의적이나 주민들은 깊은 영향을 받음. 기대감상승. 하지만 서로 신경전이 있음.
2) 박정희
육사출신. 수줍음. 탁월한 군인. 공산주의의 혐의. 미국식 민주주의 꺼림.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 의존도가 높음. 그러나 미국의 제어 노력은 두려워함. 독립성 추구. 미국과의 신뢰감 부재. 경제성정. 중화학 공업 육성계획. 군사력 증강.
3) 유신 쿠데타와 워싱턴의 묵인
장기집권시도. 독재정부화. 미국대선기간 이용. 워싱턴은 반대의견을 밝히지 않기로 함. 박정희의 미국 중국간 화해에 대한 미국불신감 우려. 불간섭주의 태도. 북한도 불간섭.
4) 10월 유신의 영향
민주화 탄압. 언론 탄압. 김대중의 등장. 김대중 납치사건. 남북대화 시들해짐. 남북대화는 남과 북에서 모두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됨. 북한은 특히 서유럽으로부터 국가로 승인을 받음. 교류국 증가. 미국과 교류시도. 하지만 통일은 전혀 기대하지 않음. 그러나 평화통일의 가능성은 엿볼수있음.
3장
1) 깊어지는 갈등
육영수여사 암살. 적대감 고조. 한국내 시위가 격화되면서 인권문제 비화. 코리아게이트.
2) 일본과의 갈등
문세광은 제일교포. 일본에 사과 요구. 일본의 부인. 미국의 중재로 일본의 사과가 이루어짐. 박정희의 인간적 고립.
3) 땅굴 전쟁
땅굴 발견. 방어선 후방을 공격하려는 의도. 전 비무장지대에 걸쳐 땅굴 탐사. 남침의도로 해석됨.
4) 북으로부터의 도전
적화통일 의도. 중국과 소련의 반대. 중소는 미국과 관계개선중이었음.
5) 사이공의 메아리
미국의 월남전 패배도 원인중 하나. 월남전을 본 김일성의 야욕을 중국은 협력거부, 소련도 거부. 미국 내애서도 간섭주의가 힘을 얻음. 긴장감 고조.
6) 남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남하느이 핵무기 개발 의지. 미국에 의해 좌절됨. 안보관계 전면재검토 카드에 박정희 굴복.
7) 판문점 도끼 살해사건
미국은 미루나무를 베어버리는 선에서 보복을 마무리함. 전쟁비화를 우려함. 북한도 매우 긴장한 상태였음. 확전경계
4장
1) 카터가 몰고 온 찬바람
주한미군 철수 주장.
2) 카터의 철수론 : 그 기원과 실행
선거공약이어서 실행한다는 논리. 강력한 의지가 있었음. 행정관료들은 모두 이에 반대하여 심각한 갈등. 감정적으로 확고한 카터. 박정희는 이를 경계. 보상책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함. 박정희 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여론 악화. 코리아게이트. 브레진스키에 의해 철군을 연기하는 대신 규모를 줄이는 방안 채결. 하지만 연기는 곳 취소.
3) 북한의 입장
카터말대로 철군시 패권장악 희망. 카터에 대해 유화적. 그러나 점점 카터가 물러나면서 북한도 비판적이 됨. 북한은 이념교육에 치중. 북한은 내수위주의 경제. 남한은 수출위주의 중공업. 주체경제의 한계. 중소분쟁중에서 어느쪽으로 기울지 않으려고 노력.
4) 주한미군 철수론의 종언
북한의 남하움직임 포착. 카터의 철군론을 끝냄.
5장
1) 대통령 암살과 그 이후
김재규의 암살. 불확실성의 시대. 남한이 성장하여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시할 수 없어짐.
2) 전두환의 등장
쿠데타.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함. 통제력 상실. 완전히 장악할때까지 미국과 대화 거부. 철저히 정략적인 사람.
3) 광주민주화항쟁
전두환 북한위협설 조작. 계엄선포. 김대중의 연행. 미국은 이를 허용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압력을 가하는 방안. 반미감정고조. 위컴의 전두환지지. 하지만 미국 자체는 전두환에 냉담.
4) 김대중 구명 운동
김대중을 석방하여 미국의 지지를 얻음. 카터행정부와 대조적인 레이건행정부. 우호관계추구. 전두환정권의 기정사실화.